20150129000685_0자기 실현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어떤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그 믿음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예언을 말한다. 예언의 내용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을 진짜 약이라고 속여 환자에게 복용시킬 때 병세가 호전되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도 비슷한 유형이다.

자기 실현 예언이 학술 용어로 자리잡게 된 것은 20세기 사회학자 머튼(R. Merton)에 의해서다. 머튼은 그의 저서 ‘사회이론과 사회구조’에서 가상적 은행 부도 사태로 자기 실현 예언을 설명해낸다. 한 은행에 우연히 많은 수의 고객들이 예금을 인출해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그것을 목격한 다른 예금주들이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에 덩달아서 예금을 인출해가면서 대량 예금 인출 사태(bank run)가 촉발되어 재정적으로 건전한 은행이 갑작스럽게 부도에 직면하게 되다는 시나리오다.

자기 실현 예언에서 중요한 것은 예언의 내용이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예언일 경우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온갖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사회적 후생이 성취될 수 있다.

반대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예언이면 그 결과는 정말로 참담해진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기 살기에 급급해져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그것은 바로 사회적 후생 수준을 갉아먹는 결과로 귀착된다. 전형적인 용의자의 딜레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휩쓸고 있다. 정부 당국자, 언론, 연구소들까지 소위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이 앞 다퉈 디플레를 말한다. 누구는 내수 디플레를 말하고 누구는 부동산 디플레를 외친다. 그것이 점차 온 국민 사이로 확산되면서 ‘D의 공포’라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책임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럴 듯 해 보이는 근거를 가지고 언급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 글로벌 경기 침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빠듯하기만 한 체감 경기가 이런 예언을 뒷받침 해준다. 그러다보니 국민들 모두가 D의 공포를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제 살길 찾기에 나서고 있다.

경기가 나빠질 것이라고 하니 지갑을 닫고 소비를 줄인다. 소비를 줄이니 더 악화된 내수가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내수 측면에서 D의 공포가 자기 실현 되는 순간이다. 부동산 가격이 장기 침체할 것이라고 하니 더욱 암울해진다. 집을 사려고 하지 않으니 집값이 오를리 없다. 역시 자산시장에서 D의 공포가 자기 실현되는 순간이다.

D의 공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살아내지 못할 것도 더 나아가 이겨내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한 전쟁의 황폐를 이겨내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해낸 우리 아닌가. 지금 우리가 논의해야하는 것은 자명하다. 어떻게 하면 글로벌 공급 구조조정 과정에서 우리 산업만은 더 키워갈 수 있는 지를 고민해야하고 또 어떤 새로운 산업을 일궈낼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노벨상 하나 못 받은 나라에서 기초 R&D를 획기적으로 확충하기 위해 대학과 연구소를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씨앗을 벤처생태계에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 머리를 싸매야 한다.

줄어드는 생산가능인구와 얇아지는 중산층을 복원하고 인구 절벽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또 노사간의 담장 높이를 낮추고 이념간의 벽은 허물어야 한다.

이렇게 시급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D에 관한 논란만 지속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소모적이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건설적인 문제로 담론의 장을 옮겨가야 한다. 할말 안할말을 여과없이 쏟아내서는 곤란하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모름지기 말을 아껴야한다. 자칫 부정적인 자기 실현 예언을 유발할만한 그 어떠한 발언도 있어서는 안된다. 국민 모두가 그들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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