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VISION] (7) 팬콤인터내셔널김영민사장


▲ 커뮤니케이션과 커머셜을 총괄한다는 뜻을 담은 ‘PanCom’ 이라는 회사이름에 25년전 창업 때부터 인터내셔널을 덧붙인 김영민 사장은 “지금 40명의 직원들이 여러 인종으로 구성돼 있는 걸 보면 선견지명이 있었다”라며 웃는다. 사진 /김윤수기자

ⓒ2006 Koreaheraldbiz.com

1981년이라면 LA 한인사회에 두개의 일간신문 외에는 별다른 매체가 없던 시절이다.

그 황량한 비즈니스 토양에서 용감하게도 광고대행업의 문을 열면서 회사 이름에 인터내셔널까지 덧붙였던 팬콤( PanCom International, Inc.) 김영민사장은 25년이 지난 요즘 40명 임직원들의 면면을 보면서 새삼 자신의 작명솜씨에 감탄하곤 한다.

한국인이 3할 이상이지만 중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불가리아 유태계 미국인까지 참으로 다종 다양한 인종의 직원들로 구성돼 있는 오늘의 팬콤 사무실은 말 그대로 인터내셔널한 다국적 분위기가 넘쳐나니 말이다.

“사반세기 전에 그렸던 그림이 현실화된 셈”이라는 김사장은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 진정한 다문화 기업( True Multi-Cultural Company)을 일구었다는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는 주인공이다. 꿈을 이룬 자의 행복하고 푸짐한 얼굴 – 김 사장의 커다란 몸집에 더욱 잘 어울린다.

다인종·다문화 기업 꿈 현실화

팬콤인터내셔널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한인사회를 벗어나 메인스트림으로 파고든 광고대행사다. 기반은 코리아타운 한 복판에 두고 있지만 비즈니스 매출의 100%를 주류시장에서 끌어올리고 있다. 파이낸셜 기업 액사(AXA)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대기업 SBC ,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들인 포드와 볼보가 메인 클라이언트이다. 이들의 아시안 아메리칸 마켓 광고를 대행하는 팬콤의 외형은 연간 2천5백만달러에 달한다. 상대적으로 파이가 작은 한인시장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주저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군소 한인 광고대행사들에게는 팬콤 인터내셔널이야말로 일종의 롤모델이요, 선구자로 비칠 수 밖에 없다. 

“광고대행업은 작업시스템 상 한인사회와 메인스트림쪽을 병행하기가 참 어렵지요. 연간 계약이 이뤄지지 않으면 회사를 규모있게 꾸려갈 수 없다는 판단에서 92년부터 코리아타운쪽 어카운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욕도 많이 먹었지요.”

90년 연방센서스를 통해 미국내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의 구매력이 주류시장의 주목을 받게 됐다. 특히 전화회사와 백화점, 주류(술) 메이커들의 관심이 컸다.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의 최대 전화회사인 퍼시픽벨(현 SBC )의 대행사 선정작업에 참여, 경쟁업체 8곳을 물리치고 연간 50만달러 상당의 계약을 따내면서 오늘날 팬콤인터내셔널의 성장판을 마련했다.

“메인스트림쪽에서 인정받았다는 성취감, 비로소 미국에 와서 뭔가 정착했다는 느낌…그런 기분들 아시겠지요?”

광고대행업의 첫 간판을 내건지 불과 11년만에 거둔 성과였으니 성장세가 빠른 편이었다.

창업 11년만에 주류 시장 진출

“비즈니스에 탁월한 수완이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좋은 분들이 나타나 크게 도움을 준 덕분이지요.”

지금은 선의의 경쟁사인 ‘상암’의 서태근사장과 팬콤의 마케팅담당 사장 문영선(폴 문)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태근씨는 1989년 팬콤에 합류, 제작사 규모에서 에이전시로 회사의 형태가 변화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무렵 현대자동차라든가,  LG, 아시아나항공 등 한국의 대기업들을 고객으로 유치할 수 있었다.

UC버클리 광고학 박사 출신인 문영선 사장은 92년에 가세,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하는 데 견인차가 됐다.

개인의 인생이건, 사업이건 전환점이 있게 마련인데 김영민 사장은 팬콤 인터내셔널의 운명에서 결정적인 두차례의 시점으로 평가되는 때에 결정적인 두명의 ‘구원투수’를 만난 게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해도 그 중심엔 ‘영 킴’으로 불리는 김 사장이 버티고 있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즐거운 일터 만들기… 경영철학의 4F

아이디어 내고,콘티 짜고, 카피 쓰고, CM송 만들고…하여간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했던 멀티플레이어의 경험을 가진 CEO를 둔 직원들은 대체로 고달프게 마련이다. 스태프가 늘어나면서 김사장 또한 일일이 간섭하고 참견하다가 어느 순간 “이러다간 저들의 기회를 내가 막는 격이 된다”는 자각으로 한발 물러서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정말 쉽지 않았지요. 직원들이 자기네 손으로 직접 해낸 일들을 놓고 ‘마이 베이비’라 부르며 뿌듯해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편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일터를 마련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있고 중요하다는 걸 새삼 확인했지요.”

김 사장은 ▲Fun ▲Financilal Reward ▲ Future ▲Family의 머릿글자를 따 ’4F’라 부르는 자신만의  운영방침을 갖고 있다. 특히 즐거움과 가족의 가치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루의 3분의 1을 직장에서 보내는 데 그 시간이 힘들면 내가 다른 사람의 인생 3할을 힘들게 만드는 격이지요. 가장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갖도록 우리 회사는 Fun Calendar, Fun Event 등을 마련합니다.”

이를테면 금요일마다 회사가 제공한 식사를 함께 주문해 먹는다든가, 여름마다 전 직원 가족들이 다같이 1박2일씩 Family Retreat를 갖는 것 등이다. 부부세미나를 개최한다거나 가정방문까지 해가면서 직원들의 개인생활을 챙기는 것을 김사장은 당연한 CEO의 의무로 여긴다.

“지금껏 매출이 목표가 된 적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컬처가 있지 않으면 회사가 성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직률이 높은 광고업계에서 유독 팬콤인터내셔널에선 10~15년 근속자들이 적지 않은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 팬콤 김영민 사장은

대학가요제의 ‘나 어떡해’로 유명한 서울농대 밴드그룹 샌드페블스 2기 출신인 김 사장은 미국에 건너오기전 광고회사 LG애드에 몸 담았다.

4년여 동안CM제작과 기획 등을 두루 경험한 터에 미국에서 광고회사를 차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72년에 이민와 정착한 누이의 권유로 도미했다. 지금은 없어진 한 신문사 광고사원으로 취직해 쥐벼룩에 물려가며 서너달 고생했던 이민 첫 직장생활의 고달픈 기억과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뛰다가 한국자동차그룹의 광고제작에 손을 댄 우연한 기회를 통해 비교적 빨리 ‘창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픽파크’ ‘ Q스튜디오’ 두곳의 영세한 광고회사 틈새에서 팬콤 인터내셔널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이민 1년만에 이민사회 광고업계에 뛰어든 김사장은 초기 10년여 동안 코리아타운 광고제작및 대행사로서는 거의 독보적으로 활동했다. 온누리교회 장로를 맡고 있다.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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