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명품백’

▶여성에겐 설명이 필요 없는 3초백, 5초백, 7초백
 지하철이나 버스, 거리 곳곳에서 3초, 5초, 7초마다 마주친다고 해서 요즘 젊은층 사이에선 “루이비통은 ’3초백’, 구찌는 ’5초백’, 에트로는 ’7초백’”이란 말이 나돌고 있다. 물론 정확한 조사를 거친 게 아니어서 이견이 분분할 순 있지만 루이비통, 구찌의 백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 땅을 휩쓰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 명품 백은 한국 여성(일부 남성도!)들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명품 욕망을 한껏 부채질하며, ‘나도 이젠 명품족’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상징물이 되고 있다.
 요즘 서울시내 면세점의 루이비통 매장은 열기가 매우 뜨겁다. 해외여행길에 오르며 루이비통 백을 싼값에 사려는 이들로 북새통이다. 그중에서도 ‘스피디(Speedy)’는 면세점마다 하루 약 10~30개씩 팔려나갈 정도로 가히 폭발적이다.
 일명 ‘보스톤백’이라 불리는 이 백은 루이비통 핸드백 중 가장 값이 저렴(가로 25·30·35·40㎝별로 52만~59만원)한 데다, 매우 가볍고 아무 옷에나 무난하게 어울려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백화점 매장에서도 마찬가지. 면세점보다 20%쯤 비싸지만 역시 잘 팔린다. 그러다 보니 스피디는 3초마다 마주치는 ’3초백’이 됐다.
 물론 ‘루이비통 왕국’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다. 도쿄의 20대 여성 94%가 루이비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교지로 하타 루이비통재팬 사장은 “일본에서 워낙 강세다 보니 일본 브랜드로 착각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도 만만치 않다. 아시아명품마켓 연구가인 라다 차다는 “20대 서울 여성의 50%가 루이비통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 중에는 ‘짝퉁’도 적지 않겠지만 최근 들어 한국도 명품 소비의 5단계(정복→경제성장→과시→동조→일상화) 중 4단계인 ‘동조’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에 루이비통, 구찌 같은 대표 명품 백들이 더욱 거리를 도배할 것으로 전망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명품 소비의 최종 단계(일상화 단계)에 접어든 일본에선 초등학생까지 루이비통 지갑을 쓰고, 생선가게 상인들조차 루이비통 가방에 영수증을 보관할 정도니 한국에서는 좀더 갈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다. 즉 일본에서 루이비통이 스시나 녹차처럼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필수품이 된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판기 커피처럼 흔해질 날이 머지않았다.
▶유니폼이면 어때요? 명품 대열 진입이 더 중요하죠
 얼마 전 어머니와 함께 면세점을 찾은 대학생 김지은(22) 씨는 에트로 백을 사려는 어머니와 입씨름을 벌어야 했다. 지은 씨는 “루이비통을 사서 같이 쓰자”고 고집했고, 결국은 루이비통 백을 구입했다.
지은 씨는 “우리 같은 명품 입문자에게 루이비통 ‘스피디’는 딱 맞는 백이다. 또 전 연령대가 쓸 수 있는 백”이라며 “친구 4명과 일본에 갔는데 모두 ‘스피디’여서 가방이 수시로 바뀌곤 했다”고 들려줬다.
또 “지난해까지도 ‘짝퉁’이 꽤 있었지만 올 들어서는 ‘짝퉁’은 졸업하고, 오리지널을 구입하는 게 대세”라고 귀띔했다. 모 특급호텔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유혜영(26) 씨도 얼마 전 ‘스피디 35′(가로 35㎝ 크기)를 샀다. 유씨는 “나도 너무 흔해서 고개를 저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명품치고는 너무 싸고, 쓰임새가 많아 개의치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반된 의견도 적지 않다. 회사원 최은경(33) 씨는 “몇 년 전 ‘모노그램’을 샀는데 요즘은 옷장 속에 처박아 놓았다. 여고생 책가방도 아니고 너무 하지 않느냐?”며 비판했다.
 파리에서 10년 넘게 활동했던 패션컨설턴트 심우찬 씨도 “프랑스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루이비통을 유니폼처럼 들고다니는 것을 ‘몰개성의 극치’로 본다”며 “50만~60만원짜리 백 하나 샀다고 명품 대열에 진입했다고 판단하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루이비통에 비하면 구찌는 디자인이 다양해 ’5초백’으로 꼽히긴 해도 ‘이거다’ 하는 대표 아이템은 없다. 구찌의 ‘G’로고가 새겨진 사각 자카드백이 5초백 후보로 가장 유력하지만 G로고의 구찌 백 전체를 5초백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7초백으로 지목되는 에트로는 페이즐리 무늬의 갈색 백이 베스트셀러 백. 주로 40~5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러나 ‘C’로고가 프린트된 셀린느 백과 프라다 백, 체크무늬가 도드라지는 버버리 백이 7초백에 더 가깝다는 설도 있다. 다양한 명품 백 디자인 중에서도 효자상품은 역시 로고가 반복적으로 찍혀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로고피케이션 백’이어서 역시 명품 구입 시 ‘타인의 시선’이 가장 중요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강박에 가까운 명품 집착, 누가 막으랴
 한국의 명품에 대한 집착은 세계에서도 알아준다. 이미 꼭짓점을 찍은 일본과는 달리, 한국 명품시장은 해마다 10~15%씩 성장하고 있어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 탐나는 시장에서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해 거의 필사적이다. 게다가 남과 똑같이 보이기 위해 명품을 구입하는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의 젊은층은 ‘같으면서도 튀기 위해’ 명품을 구입한다. 또한 한국 여성들의 ‘외모 및 세련된 패션에 대한 욕망’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준다. 외국 명품업체의 CEO들은 “한국 젊은 여성들의 미적 센스와 명품 소화능력은 정말 놀랍다. 단연 최고 수준”이라고 혀를 내두른다. 거의 강박에 가까운 외모와 패션에 대한 집착은 “루이비통과 구찌는 거의 홍역이다. 누가 이를 막겠는가”라는 자조 섞인 탄식도 낳고 있다. 부작용도 많지만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 전 ‘럭셔리 코리아’를 펴낸 김난도 교수(서울대 소비자학과)는 “기성세대 시각에선 명품 백에 목을 매는 젊은층이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들에게 물질주의를 버리라고 강변할 순 없다”며 “들로 산으로 나가 놀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요즘의 20대는 소비문화가 놀이문화를 대체한 첫 세대”라고 지적했다. 즉 쇼핑몰 누비기가 최고의 놀이라는 것.
 사치의 유형은 ▷과시형 ▷질시형 ▷환상형 ▷동조형 등으로 나눠지며 최근과 같은 ‘덩달아 명품 백 구입’은 남과 똑같아지길 원하는 동조형 사치에 해당된다. 또 20대 여성의 경우는 ‘질시형 사치’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명품이 남들의 무시를 막아주는 ‘갑옷’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흔하디 흔해도 그 대열에 끼어든다는 분석이다.
 한편 명품 백이 대중에게 파급되는 과정도 흥미롭다. 명품업체가 스타 등 트렌드세터에게 백을 제공하는 걸 시작으로 ‘버즈(buzz·열광)’가 생성되면 VIP고객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단계에 도시 전체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버즈가 창출되는 것이다.
 일반대중은 결국 이 시끌벅적한 버즈를 좇아 행동하며, 지갑을 열고 명품을 구매하며 열풍을 만든다. 그로 인해 똑같은 백들이 사방에 쫘르르 깔리는 것이다.
 ”이 땅의 소비자들은 세상에 태어나 엄마, 아빠 다음으로 명품을 자각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명품의 유혹은 날로 강력해지고 있다. 파고드는 연령층도 갈수록 어려진다.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갖기도 전에 무차별 소비에 노출되는 젊은이들에게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명품 백 사재기가 팽배하는 건 자명한 일.
 게다가 명품 백은 이제 더는 ‘백’만이 아니다. 개인의 정체성과 신분을 증명하는 증명서요, 프로토콜(규약)인 것이다. “적금통장 없인 살아도 명품 백 없이는 못 산다”고 외치는 젊은층이 늘면서 명품시장은 오늘도 브레이크 없는 기관처럼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명품은 가질 때는 황홀하지만, 가질수록 더 배고파지게 마련이다. 지갑은 얇게 하고, 욕망은 더욱 두껍게 만드는 명품. 이 홍역을 누가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이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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