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검찰청 앤 박 검사

앤 박 검사
LA카운티 검찰청의 앤 박 검사는 강력범죄를 다루는 검사로서 냉정하고 날카로울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눈물많고 정 많은 ‘한국여성’이다.
LA카운티 검찰청의 앤 박 검사(50. 한국명 박향헌). 성범죄,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주로 여성와 청소년, 아동과 관련된 사건들을 맡아온 그녀는 19년 경력의 베테랑 검사다. LA다운타운에 위치한 LA검찰청에서 만난 그녀는 강력범죄를 다루는 검사로서 냉정하고 날카로울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눈물많고 정많은 ‘한국여성’이었다.

“사건이 아닌 사람을 보는 검사가 되자고 늘 다짐해왔습니다. 원고의 아픔도 보아야 하고 혹 있을지도 모를 피고의 억울함도 간과해서는 안되지요. 그렇다고 감정에 휘둘려서도 안됩니다. 가끔 재판중에 북받쳐 오를때가 있는데 그럴때는 눈물을 참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예요”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17세에 미국으로 이민온 앤 박검사는 UC버클리에서 여성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당시 그녀의 꿈은 ‘쇼셜워커’였다. 사람들을 섬기고 나누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를 보며 그녀 또한 사람돕는 일을 하고싶다는 비전을 품게 됐다. 대학시절 내내 한인봉사회 활동도 열심으로 했다.

“전공이 그렇다보니 봉사회에서 여성관련 프로그램을 주로 맡았어요. 특히 가정폭력, 성폭력 등의 피해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임시 잠자리를 찾아주고 접근금지 명령을 받을 수 있도록 서류작성을 도우면서도 늘 괴로웠지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다친곳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일밖에 안되는 구나. 좀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보니 그게 법이더라구요”

다시 법대에 진학, 1991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녀는 민사소송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그또한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락하고 보장된 미래의 변호사직을 내려놓고 다시 봉사회로 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부모님만큼은 그녀를 지지하며 자랑스러워 했다. “다시 돌아간 한인봉사회에서 디렉터로 일한 2년은 제가 검사가 되기까지의 준비기간이었어요. 공공의 정의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 시간이었죠. 4.29폭동때에는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아메리칸 라운드 테이블을 만들어 토론의 장을 열었어요.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희열같은 것을 느꼈죠. 대중연설 실력도 그때 많이 늘었어요. 전엔 사람들 앞에만 서면 벌벌 떨었거든요(웃음)”

1994년 그녀는 LA카운티 검찰청 검사임용에 당당히 합격하며 30대 초반의 한인 여성검사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이른다.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왜 상처를 내면 안되는지 피해자의 대변인으로 나선것이다.

“19년동안 정말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는데 내가 세운 원칙이 있다면 재판에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말자는 거예요.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면 사람들을 보지 못하죠. 피해자가 위로받지 못하고 치유받지 못하면 내가 사형을 구형해도 피해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가해자도 마찬가지예요. 이기는 것이 , 유죄판결이 목적이 될수는 없죠. 법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한사람도 억울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앤 박 검사는 지난해 5월 일선 ‘재판부’를 떠나 ‘항소부’로 자리를 옮겨왔다. 소수의 검사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일종의 승진인 셈이다. 지난해 그녀가 맡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브라이언 뱅크스 사건’은 항소부행을 결심하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성폭행범으로 옥살이까지 마친 청년이 10년만에 항소해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으로 박검사는 이 무죄판결에 깨끗히 동의, 과거 검찰측의 실수를 인정했다.

“주위에서는 검사인생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여지도 없는 일이었어요. 항소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가치있는 일인지 깨달았죠. 누구도 억울해선 안되니까”

재판장을 뛰어다닐 때 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난 것도 감사하다. 결혼 11년째, 중학교 교사인 남편과 딸 충만(10), 아들 요셉(7)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박검사는 아이들의 도시락을 손수 만들때 가장 행복한 보통엄마다. 새해에는 한인검사협회 회장과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서부지회 OC지부 회장직을 맡아 어느해보다 커뮤니티 활동도 활발히 벌일 예정이다. 바램은 미래 한인 법조인과 한인여성리더들을 키워내는데 그루터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법대에서 가장 스피치를 못하는 학생 중 하나였어요. 처음 LA카운티 검찰청에 왔을때 한인여성은 나를 포함해 딱 두명이었죠. 처음부터 완벽하고 풍족한 것은 없어요. 타고나는 것 보다는 노력과 훈련의 결과가 더 크고 값지다고 봅니다. 적어도 제 경우엔 그랬어요(웃음)”

하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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