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의 언덕에서…거친 나를 만나다

우리의 산하(山河)는 하나다.

백두는 지리산 천왕봉까지 달음질하면서 맏아들 격인 1개의 정간(正幹)과 10대 강의 정맥(正脈), 12개의 기맥(岐脈)을 낳았다. 태백산맥, 소백산맥이니 하는 ‘산맥’은 왜인 야스 쇼에이가 만든 대한민국 국토 단절의 기록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정간ㆍ정맥ㆍ기맥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고,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을 나누어 강을 만들었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는 백두대간(大幹)을 오르는 산 사람의 마음자세이기도 하다.

강원도 태백시 매봉산 옆 ‘바람의 언덕’에는 백두대간임을 알리는 바위표석이 있다.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이며, 국토의 골격을 형성한다. 자연ㆍ사람ㆍ문화가 함께 살아 숨쉬는 풍요로운 큰 산줄기이다.”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있는 매봉산‘ 바람의 언덕’ 일대는 여름엔 고냉지 채소로 뒤덮여 푸른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겨울엔 쌓인 눈이 좀처럼 녹지 않아 은빛 천지로 탈바꿈한다. “휘익~획” 하는 풍력발전기 소리는 백두대간의 위용을 더한다.                         [사진제공=정백호 여행사진작가]

세찬 바람 때문에 풍력단지가 조성된 바람의 언덕에서 남동쪽으로 2㎞가량 떨어진 삼수령(三水嶺)은 세 개의 강물이 갈라진다는 뜻을 가진 고개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남하하며 뻗어가던 백두대간이 살짝 우회전하면서 한강의 첫 물줄기를 만들었으며, 왼쪽으로 형성된 낙동정맥의 동쪽은 낙동강의 발원 연못인 황지(黃池)를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졌고, 서쪽은 삼척 일대를 휘감아 돌다 동해로 빠져나가는 오십천을 빚어냈다. 삼수령과 바람의 언덕 중간지점에는 한강ㆍ낙동강ㆍ오십천 강줄기가 갈라지는 ‘3대강 꼭짓점’이 있다.

영하 15도, 체감기온 영하 20도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1월, 18㎞ 길이의 태백 3대 강 발원지 탐방로는 용기있는 자의 전유물이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에서 출발해 수아밭령, 비단봉을 거쳐 바람의 언덕에 오른 뒤, 다시 왼쪽 낙동정맥의 임도를 따라 대박동, 창신월드, 화약골, 바람부리마을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황지연못에 도착하는 데 8시간가량 소요된다.

바람의 언덕 북쪽 3㎞ 지점 대봉산 기슭에 있는 검룡소는 하루 2000t의 지하수가 석회암반을 뚫고 나와 20여m에 이르는 계단식 폭포를 만드는데 그 물줄기가 용틀임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물은 한강으로 이어진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바다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한강 시원(始原)을 찾아 거슬러 올라왔는데, 이곳에 이르러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몸부림친 자국이라 한다.

검룡소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험가임을 자처하는 3050 사나이 넷의 표정엔 자신감이 묻어났지만 바람의 언덕은 과연 매서웠다. 조선중기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서 훌륭한 피난처로 묘사된 ‘귀내미마을’을 거쳐 바람의 언덕을 오르는 길 옆은 고랭지채소 단지지만 흰색 눈가루만 세차게 날릴 뿐이었다.

체감기온 영하 25도. 여름에 이곳은 푸른색으로 도배될 것이라고 상상하며 풍력발전소 바람개비만 보면서 한걸음 한걸음 옮긴 끝에 도착한 바람의 언덕은 추위를 잊게 할 정도로 장쾌하고, 속이 후련할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 칼날같은 바람은 얼굴과 손을 후볐지만, 천촌만락과 고산준령을 발 아래에 둔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풍력발전기의 ‘쉬익, 쉭’ 소리를 들으며 삼수령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리 뿐일 거야”라고 의기양양했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낙엽송 군락지를 지날 무렵 여대생을 포함한 2030세대 너댓 명을 마주치는가 싶었는데, 조금 더 가다보니 10대 여럿이 내기하듯 등정을 시도했고 50대 모험가가 눈에 띄기도 했다.


삼수령 휴게소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한 뒤 낙동정맥을 따라 대박동에 들어선다. 이곳 이름은 시쳇말 ‘대박!’과 통한다. 오르내리는 작은 고개가 가파르기 때문에 ‘되다(매우 힘들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대박동을 지나 창신월드, 화약골삼거리에 이르는 임도는 완만하고 포근하다. 남서쪽으로 달음질치는 백두대간이 막아준 덕분인지 바람도 덜하다.

7시간을 걷다보니 민가가 보인다. 바람부리마을이다.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민가엔 어르신 몇 분만 눈에 띄었지만, 탄광지역이 호황일 때 이곳은 광부가 한껏 목청을 뽐내는 ‘니나노집’이 모여있었다고 한다.

황지동 자유시간을 거쳐 시내 한가운데 불쑥 연못이 나타나는데, 바로 낙동강 발원지 황지연못이다. 주변 산이 만들어낸 물길이 땅속으로 숨었다가 솟아오른 곳이다. 연못이라 하기에는 너무 맑은 이유다. 이 물은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지점에 있는 구문소를 지나 경상도 내륙을 적시고 부산을 거쳐 남해바다에서 몸을 푼다. 노승에게 쌀 대신 쇠똥을 시주한 황부자의 집이 저주받아 땅속으로 꺼진 자리라는 전설도 있다.

3대강 발원지 탐방길은 울면서 시작했다 웃으면서 끝내는 곳이라 매력적이다. 길을 가다보면 태백다운 ‘로컬푸드’ 산나물 직매장과 고원자생식물원이 눈길을 끈다. 장쾌한 대간과 정맥 사이로 스토리와 정감이 깃든 곳이다.

누군가 역사는 개척자의 것이라고 했다. 겨울 백두대간 탐방로는 모험가의 것이다. 백두대간 등정을 걸고, 나약해졌을지 모를 나에게 내기를 걸어보자. 

함영훈 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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