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넘치고 살아있는 스케치…남녀경계 허문 ‘1980 패션혁명’

육감적인 엉덩이 · 파워 숄더…
‘할스톤 니트웨어’에 고스란히
짧은시간 모델들 특징 극대화
작품 곳곳 패션 천재성 나타나

‘10 꼬르소 꼬모 서울’ 오픈 6주년
이달 27일까지 작품 111점 전시


고작 5년이었다. 서른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재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토니 비라몬테스(Tony Viramontesㆍ1956~1988)’의 전성기는 그렇게 짧았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그 5년 동안 엄청난 양의 작업들을 쏟아냈다.

비라몬테스는 전설적 디자이너로 꼽히는 발렌티노, 장 폴 고티에, 하나에 모리의 총애를 받았고 지방시, 이세이 미야케, 입생로랑, 피에르가르뎅, 웅가로, 디올, 샤넬과 작업했다. 이사벨라 로셀리니, 팔로마 피카소, 재닛 잭슨 등 당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1983년 작업 중인 토니 비라몬테스

이런 그의 5년간의 작업 111점이 한국을 찾았다. ‘10 꼬르소 꼬모 서울’ 오픈 6주년을 기념한 전시로,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3층에서 4월 27일까지만 열린다.

그에 대한 패션계의 러브콜은 그의 데뷔와 동시에 일어난다. 1970년대 후반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로 입문하자마자 그와 일하고 싶어하는 잡지들이 넘쳐났다.

미국의 ‘보그’지, 영국의 ‘더 페이스’지, 프랑스의 ‘마리클레르’ ‘르 몽드’지의 에디터들은 비라몬테스의 강하고 직설적인 스타일을 보자마자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전초라는 것을 직감했던 모양이다. 

Halston Knit Wear.1983.

곧 1970년대 주류를 이뤘던 은은한 비주얼은 1980년대의 열정적이고 극단적인 스타일에 자리를 내준다. 그렇게 패션의 전성기인 1980년대가 시작됐다.

그의 작품을 보면 당시의 열기가 고스란히 읽힌다. 젊고 아름다운 존재들에 대한 숭상, 현란한 디스코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 천재적 창조성을 추앙하던 시대적 배경이 붓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스케치로 태어났다. 순간적인 특징을 극대화해 그린 일러스트는 과감한 디테일의 생략으로 오히려 사실성을 얻었다. 재료도 콩테, 목탄, 과슈, 펜을 비롯해 화장품까지 사용할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1983년 이후 그의 작품은 더욱 대담해지고 예술성에서도 진보한다. 유명 브랜드 하우스들과 오트 쿠튀르 작업을 위해 파리로 이주한 영향이다. 작업 방식도 일러스트 위주에서 콜라주로 넓어진다. 특히 이세이 미야케와의 작업으로 일본의 매력에 빠져 독특한 일본화풍이 이후의 작업에서 종종 드러난다.

비라몬테스는 “나는 직접 보고 창조성을 깨워줄 모델이 필요해요. 그저 상상만으로 그릴 순 없죠(I need a model to see and create. I can’t just imagine)”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모델과 대면하는 작업을 선호했다. 몇 시간씩 포즈를 취하는 모델들을 앞에 놓고 빠르고 힘에 넘치는 드로잉으로 특징만을 캡처한 수십여장의 그림을 쏟아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1983년 작 할스톤 니트웨어는 이런 그의 스타일이 도드라진다. 육감적인 엉덩이, 파워 숄더로 대변되는 힘 있는 어깨를 건방질 정도로 휘갈기듯 그렸다. 남성 모델인데도 여성 모델처럼 감각적이다. 당시의 트렌드였던 ‘유니섹스’는 남녀의 경계를 허물고 결정적으로 남성적 정체성의 경계를 늘렸다. 비라몬테스가 그린 남성모델들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로 치장했으며, 이국적 터번을 쓰고 뇌쇄적인 포즈를 취했다.

Nina Rici 오트 쿠튀르, 1984.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에서 읽히는 것은 당시의 열기와 작가의 천재성 그리고 천성적인 우울함이다. 가장 화려한 비즈니스인 패션에 종사했지만 정작 자신은 깊은 외로움에 끊임없이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수많은 연인들과 사랑을 나눴지만, 마지막으로 그를 차지한 것은 AIDS였다. 전시 제목처럼 ‘대담하고, 아름답고, 저주받은’ 토니 비라몬테스의 일대기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패션과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전시를 돌아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한빛 기자/[email protected]

[사진제공=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