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문 곳, 일제 수탈의 현장 군산

[헤럴드경제(군산)=이윤미 기자]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큰 길가에서 500여미터 들어선 발산초등학교는 반듯한 연미색 건물과 양지바른 운동장, 병설유치원까지 여느 초등학교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아이가 꿈꾸는 발산초등학교’라는 푯말도 일상의 풍경을 더할 뿐이다. 운동장과 초등학교 건물을 옆으로 비끼며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그닥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살짝 올라 앉은 병설유치원에 다다라서야 일본인 지주 시마타니가 왜 이곳에 집을 지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햇볕 가득 펼쳐진 너른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시마타니는 대저택을 짓고 이 땅을 수탈해갔다. 유치원 옆, 평평한 소나무 숲에는 마치 유물 박물관인듯 석물들이 한 곳에 무더기로 모여있다. 이 중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은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원래 완주군 고선면 삼기리 봉림사터에 있던 게 엉뚱하게 이곳에 와 있다. 원통형 기둥에는 구름 속에서 요동치는 힘찬 용의 모습이 조각돼 있는데 이런 형태는 국내에 유일하다. 신라탑의 양식을 계승한 간결미를 보여주는 고려 5층석탑과 어느 집 묘를 지켰을 양의 석물 등 다양한 유물들은 제짝이 아니지만 그렇게 90여년을 함께 해왔다. 


이 곳은 1920, 30년대 군산의 5대 부호로 꼽힌 도곡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의 옆 뜰이다. 병설유치원 자리에 시마타니는 거대한 저택을 지었다. 시마타니 저택의 규모는 현재 군산시 근대문화거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히로쓰 저택의 5배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대저택이 해방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지고 석물 일부와 금고만 남아있다.

시마타니는 우리 문화재 수집에 열광했다. 안목이 뛰어났던 그는 문화재들을 불법으로 끌어모아 자신의 뜰을 장식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석물로 정원을 꾸미며 손님을 초대해 자랑하는 게 일종의 부자들 취향이었다.

병설유치원 뒤로는 시마타니가 수집한 골동품을 보관한 시마타니 금고가 당당하게 서 있다. 시마타니 가옥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1920년대에 지은 3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시마타니금고의 입구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파랑색 철제 금고문이 단단하게 달려 있어 견고함을 자랑한다. 창문은 이중 잠금 장치로 단속했다. 이런 보안장치로 6.25전쟁 상황에서는 인민군 본부로 사용돼 우익인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건물은 독특한 건축형태로도 유명하다. 빗물과 햇빛가리개 역할을 한 부섭창과 대리석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콘크리트 벽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내부는 너른 마룻바닥으로 1층에 이어 다락방처럼 2층이 이어졌고, 판지를 열면 지하로 연결되는 구조다. 사마타니는 이곳에 현금과 서류 외에, 서화, 그림, 도자기 등 골동품 등을 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골동품들이 아까워 이 땅에 남아 있으려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전라도 미곡과 수산이 모이는 군산은 1899년 5월1일 개항과 함께 외국인 거주지가 해안가를 따라 형성됐지만 일본강점이 시작된 이후에는 일본의 철저한 수탈로 피폐해져 갔다. 일본인 부호들은 대부분 대량으로 땅을 사들인 뒤 간척 사업을 통해 농장을 만들고 도조를 올리는 수법으로 농민을 수탈해 부를 쌓아올렸다. 땅에서 쫒겨난 소작농들은 도시로 몰려와 달동네를 형성했고 여성들은 정미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했다.

시마타니를 비롯, 미야자키, 구마모토, 모리기쿠, 히로쓰 등 일명 일제 군산 5대 부호들이 쌓은 부는 이런 수탈의 결과였다. 각 농장의 미곡장에 모아진 쌀은 우마차로 군산항으로 이동했다. 일본군 군량미로, 일본인 식량으로 실어나를 쌀가마니가 군산 미곡창에 가득했다. 현재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는 당시 밀물과 썰물에 구애받지 않고 24시간 쌀가마니를 실어나를 수 있도록 특수 고안된 뜬다리가 여전히 작동중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리전체가 떠 마치 육교처럼 쌀을 실어나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허 다리다. 


군산에는 1920, 30년대 일본에 의해 형성된 근대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군산의 근대문화거리를 여행하고 싶다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하면 된다. 군산의 역사와 미두장, 신발가게, 정종가게, 사진관 등 거리 모습을 재현해낸 박물관은 20,30년대 군산을 이해하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박물관 바로 오른쪽에는 옛 군산세관이 자리잡고 있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벽돌로 지어진 유럽양식의 건물로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함께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다. 독일인 건축가가 지은 건물로 1908년에 준공됐다.

해망로를 따라 박물관 왼쪽 길로 300미터 쯤 내려오면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세운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조선근대건축관)이 자리잡고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이다. 조선근대건축관 길 건너에는 채만식 소설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본정통으로 불린 이 큰길 앞 삼거리 미두장 앞에서 ’탁류‘의 주인공 정주사는 애송이에게 멱살을 잡혀 창피를 당한다. 미두장이 있던 곳에도 비가 서 있다.

미두장으로 불린 미곡취인소는 지금의 증권거래소와 비슷한 구조였다. 주로 거래되는 곡식이 쌀과 콩이었기 때문에 미두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곡식을 사고 팔면서 생기는 시세 차익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노름이 횡행했다. 미두 열풍은 전국을 휩쓸었는데 쌀의 시세는 하루 17번 요동쳤다. 조선산 쌀의 가장 큰 소비자였던 일본의 오사카 시세를 취인소에서 전화로 전달받아 공시했다. 미두꾼들은 미두장 주변의 중매점을 대리 거래인으로 삼아 미두거래를 했다. 군산의 미두장에는 충청도, 전라도의 갑부들이 몰려들었지만 일본인에 비해 정보와 자본이 달려 대부분 돈을 잃고 일명 ’하마꾼‘으로 전락했다. 하마꾼이란 미두장 안으로 들어갈 돈이 없어 바깥에 머물며 변하는 시세를 알아맞추는 내기를 하는 사람들로 ’탁류‘의 정주사는 그렇게 생계를 이어갔다. 군산의 미곡취인소는 1932년에 설립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가 직전인 1940년까지 존속했다.

미두장 앞 큰 길, 대학로를 따라 올라가면 볼거리가 이어진다. 이성당 빵집과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무대 ‘초원사진관’ , 일본식 가옥체험숙박시설 고우당과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 히로쓰 가옥은 관광객의 출입이 2월말까지 허용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북쪽이 살짝 꺽인 1자형 주택으로 운치있는 정원과 수영장, 온실을 갖춘 저택이다. 히로쓰는 미곡거래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까지 둘러보고 군산경찰서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마트 큰 길 건너 뒤쪽에 협궤 철도가 놓인 색다른 철도변 풍경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도심에서 다소 벗어난 곳이지만 개정동에 자리한 대지주 구마모토의 별장도 볼거리다.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의 온돌방, 일본식의 중복 구조를 동시에 지닌 이 별장은 바닥은 티크목으로 정교하게 짜여져 있고 외국에서 수입한 샹들리에와 고급 가구들을 갖추고 있어 토지 수탈을 통해 일본 지주들이 누린 부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곳은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 위생과 보건 전문 교육을 위해 헌신한 쌍천 이영춘 박사가 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meelee@heraldoc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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