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6ㆍ25 ①] 아군 총격에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들…소송전은 ‘현재진행형’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뒤늦게 진실 밝혀

-피해 유가족들 정부 상대 소송전 벌이지만 어려움 많아

-그때그때 다른 법원 판단 기준…유가족ㆍ정부 혼란 가중

[헤럴드경제=양대근ㆍ김진원 기자] #1. 1950년 9월 1일. 미국 태평양함대 소속 구축함 헤이븐호는 경북 포항 송골해변에 모여있던 1000여명의 피란민을 향해 갑자기 함포를 발사했다. 전쟁통에 살던 집을 버리고 내려온 민간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포격으로 수십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사(戰史)에서는 “적군이 섞여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국군 제3사단 해안사격통제반의 요청을 받고 미 함대가 사격을 한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제3사단 사격통제반을 미군 중령인 에머리치 중령이 지휘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사격의 책임은 한국이 아닌 미국 쪽으로 인정됐다. 

6ㆍ25 한국전쟁 당시 아군에 의해 민간인 수만여명이 억울하게 희생됐지만 관련 규정 미비로 정부와 유가족이 끊없는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외국의 경우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는 일관적으로 배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2. 1951년 3월 17일. 국군 11사단 20연대 3대대는 비정규 북한군 군사조직인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전남 화순군 도암면으로 급파됐다. 동두산마을에 도착한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한곳으로 불러모으고 주민 5명을 앞으로 불러세운 뒤 도리깨로 마구때리고 자백을 강요했다. 11사단 중위 한 명을 알고 있던 마을 주민이 “그들은 무고한 사람이니 풀어달라”고 부탁해 4명은 풀어줬지만 고문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한 명은 총살했다. 당시 도암면 주민 15명이 이와 같이 억울하게 숨졌다.

같은 해 화순 경찰도 “북한군을 도운 부역 혐의자를 색출한다”며 12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냈다. 희생자 중 대다수는 주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리던 20~40대 남성들이었다.

6ㆍ25 한국전쟁 당시 ‘포항 송골해변 미군함포 사건’과 ‘화순 민간인 학살사건’의 이야기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의 조사로 뒤늦게 진실이 밝혀졌다. 모두 아군의 총격이나 포격에 의해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최근 두 사건의 피해 유가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서울고등법원은 화순 11사단 사건 피해 유족 200여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총 54억25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진실규명 결정의 근거가 된 가해자 측 경찰 등의 참고인 진술을 참고하면 고인들이 피고 소속의 군인 또는 경찰에 의해 희생된 점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반면 미군함포 사건과 관련 올해 초 대법원은 한국 정부에 책임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대법원 측은 당시 ‘적군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적으로 간주하라’는 미군의 피난민 정책과 피난민에 적군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의심한 미군의 시각이 결합돼 생긴 사건이라며 한국정부에는 법적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희생자 유족들은 미국 정부와 직접 소송전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두 사건처럼 전쟁이 끝난지 63년이나 지났지만 민간인 학살 피해 유가족들의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과거사 진실규명활동이 이뤄졌지만 피해보상과 관련된 명확한 법이나 규정이 없기 때문에 유족들은 정부를 상대로 힘겹고 지리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한국통계연감과 법조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인명피해는 99만968명에 달한다. 이 중 37만 3599명은 목숨을 잃었고, 28만 7744명은 납치 또는 행방불명됐다. 민간인 피해자 가운데 수만명은 이들처럼 아군에 의한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2010년 활동이 종료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6712건의 집단 학살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위원회의 활동 근거가 된 과거사 법을 보면 진상 조사와 관련된 내용만 있고 피해 보상에 관해서는 따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재판 결과 역시 법원이나 판사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지난해 ‘경산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등과 관련된 피해자 유가족들이 항소심에서 62억원대의 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이뤄진 ‘인천 근해 섬 주민 학살 사건’ 유족들은 10억원대 배상판결을 받았다.

때문에 피해보상의 명확한 기준이 정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관련 법안은 수차례 국회의 문턱을 넘는데 실패했다. 일률적인 잣대가 없다보니 유족이든 정부든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가면서 그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도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입법으로 일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하나하나 소송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거나 진실화해위원회 관련 입법 취지를 고려할 때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외국의 경우 과거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를 일괄적으로 배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치의 피해가 컸던 독일, 군부통치를 경험한 아르헨티나ㆍ칠레 등이 그렇다. 국내에서는 1억 1000만원의 보상액을 정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법’이 대표적이다.

지난 2012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기본법안’을 이낙연 당시 의원(현 전남도지사)이 대표발의했지만 19대 국회 회기가 종료되면서 이번에도 빛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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