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일간의 세계여행] 110. 마드리드 ‘휴대전화 분실사건’…우울한 발걸음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숙소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막 순례를 마치고 마드리드로 오는 사람도 있다. 마드리드의 알베르게는 산티아고까지 한 달을 걸어낸 사람들의 감동과 이제 산티아고로 막 떠나는 사람들의 설렘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아침에 도착한 엠은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중에 까미노를 걸었다고 한다. 지금 막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사람의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그대로 엠의 표정에 그대로 묻어난다. 상기된 얼굴로 까미노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며 한껏 들떠 있다. 


까미노에 대한 열망으로 도저히 뺄 수 없는 한 달간 걸었다는 사업가, 캐나다에 사는 마흔의 딸과 한국에 계시던 일흔의 어머니가 스페인에서 만나 함께 산티아고 길을 완주한 모녀도 도착한다.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는 길이 까미노이긴 하지만, 대장정을 마치고 만난 사람들의 여유와 풍부한 한국어 의사소통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한낮이 되고서야 사람들과 함께 마드리드 시내로 나가본다. 여행이 아니라 마실 같은 분위기다. 함께 나온 일행은 네 명, 메트로를 타고 마드리드 여행의 출발점이라는 솔 광장(Puerta del Sol : 태양의 문이라는 뜻)으로 나온다. 마드리는 최근 내가 겪은 날씨 중에 가장 화창하다. 최근에 열흘 사이에 비가 오거나 흐린 하늘을 너무 많이 봐서 오늘 이 따사로운 햇살이 너무나 감사하다. 메트로에서 비상으로 나오자마자 카를로스 3세의 기마상이 보이고 사람들은 광장을 오가며 따뜻한 햇살을 즐긴다. 


길바닥엔 마드리드, 나아가서 스페인의 모든 곳으로 통하는 9개의 도로가 시작되는 원점인 0km가 표시되어 있다.
마드리드의 상징인 곰이 딸기나무에 코를 댄 동상은 마드리드에 온 걸 실감 나게 한다. 마드리드 시민이라면 친구와 약속할 때 “솔 광장 곰 동상 앞”으로 정하면 못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솔 광장은 볼거리가 많아서 그냥 있어도 시간이 휙 간다.
오늘 처음 만난 일행들이 돌아가며 기념사진 한 장씩을 찍는다. 혼자 여행하느라 다니느라 변변한 사진이 없는 나도 오랜만에 내 카메라를 엠에게 맡기고 곰 동상 아래에서 마드리드 인증샷을 남긴다. 엠 역시 까미노 내내 함께 했던 그의 휴대폰을 나에게 넘겨주며 포즈를 잡는다. 


솔 광장에서 나온다. 이 나라의 북부 시골길을 800km나 걸은 순례자들에게 수도인 마드리드는 낯설지만 유쾌한 대도시를 선물한다.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생기 넘치는 4월의 마드리드는 여행자의 기분을 돋우어 준다. 과연 세계적인 관광도시 마드리드답다.
산미겔 시장(Mercado de San Miguel)으로 간다. 통유리로 된 아름다운 건물은 메르까도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숙소에서 늦게 나와서 시간이 점심시간은 한참 지나 있다. 이 시장에서 구경도 하고 당연히 요기도 할 참이다.
먹을거리가 넘치는 시장 안 가게에서 각자 한 접시 씩 사 와서 맥주 한 잔도 곁들이기로 한다. 먹는 것보다도 보는 눈이 더 즐겁다. 한 번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간다. 대도시의 편리함과 활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각자 사 가지고 온 음식을 놓고 먹는 시스템이다.
맥주 한 잔까지 완벽한(?) 테이블 세팅이 완료된다. 나는 까미노가 끝나고 포르투에서 나흘 동안 여행하다 와서 덜하지만, 막 순례를 마치고 도착한 다른 세 명은 감회가 더 새로워 보인다. 그렇게 어제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산미겔 시장에 모여 건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시장 저 편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소란을 피우며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먹던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그 사람에게로 쏠린다. 언어를 모르니 상황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소동은 싱겁게도 금방 가라앉는다. 별일이다 생각하며 다시 맥주잔을 든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진 후, 내 앞에 있던 엠이 갸우뚱거리며 한마디 한다.


“내 핸드폰 어디 있지?” 따로 가방을 휴대하지 않고 마드리드 시내로 나온 엠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가 이 테이블에 앉을 때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았다고 한다. 아까 어떤 남자의 소동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 사람을 향하는 동안 귀신같이 엠의 휴대폰이 사라진 것이다. 주위 상인에게 말해서 시장 경비를 불렀지만 경찰서로 가라는 말뿐이다. 이미 엠의 싱글벙글하던 얼굴은 백지장이 되고 있다. 아침에 마드리드에 도착한 이후 내내 그 휴대폰 속 까미노 사진과 동영상을 자랑하던 그였다. 휴대폰이야 잃어버려도 그 추억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 마지막 사진들을 본 게 나여서 괜히 더 미안하고 안타깝다. 


음식을 챙길 경황도 없이 엠과 다른 동행이 경찰서로 가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은 극장 앞 벤치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여럿이 움직여야 부담만 될 것 같아서 기다리기로 한다. 오랜만에 따가운 햇볕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나른하게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린다. 마드리드가 국제적인 관광도시긴 하지만 소매치기가 극성이라고 조심하라는 경고는 수도 없이 듣고 보았다. 하지만 특히 내가 그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당하는 걸 보니까 어이가 없다.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후 돌아온 두 사람은 이미 포기상태다. 경찰서에 갔더니 엠과 같이 귀중품을 분실한 외국인이 앞에 다섯 명이나 줄을 서 있었다는 거다. 기다려서 분실확인서 정도를 작성했지만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엠이 풀 죽어 말한다. 과연 눈 감으면 코 베어 먹는 대도시답다. 어제까지 산티아고 길 위에서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며 땀 흘리고 걸었던 사람이 수용하기엔 커다란 상처가 된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나에겐 남은 여행에서 너무 마음 풀지 말고 긴장하라는 경고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마음이 많이 상한 엠은 그냥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천천히 프라도 미술관으로 간다.


메트로를 타고 아토차 역으로 가서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으로 향한다. 나른한 햇살 아래 가벼운 복장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거나 놀이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오후 풍경은 참 평화롭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전 엠의 불행한 사태도 그의 가슴은 쓰리겠지만 안전에 위협을 받거나 몸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해프닝이라 생각하는 게 낫다.
드디어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이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스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 한다. 마드리드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꼽으라면 미술관에 가는 일이라고 할 만큼 마드리드는 예술작품이 풍부한 도시다. 오후 6시부터는 무료입장이라 시간을 맞춰서 온 것이다.


과연 프라도 미술관에는 책으로만 보던 작품들이 줄줄이 전시되어 있다. 고야(Goya)의 “옷을 입은 마하(Maja Vestida)”와 “옷을 벗은 마하(Maja Desnuda)”가 나란히 걸려있는 전시실에 서니 실감이 난다.
유럽회화사의 최고작품으로 일컬어진다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Velâzqez)의 시녀들(Las Meninas)도 감상한다. 역시 유명한 그림 앞에는 늘 사람이 많다.
눈에 익은 그림들, 귀에 익은 작가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예술품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모든 것을 보려고 애쓰지 않고 눈이 가는 작품들에 시간을 더 할애 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학교 미술시간이나 책에서 읽었거나 어딘가에서 봐서 상식으로 알던 작가, 작품들이 많은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나와 메트로를 타러 가는 길, 아까 봤던 아토차 역에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마드리드 시민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메트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간다. 여행자를 등치거나 아름다운 명화를 보여주는 낯선 관광지에서도 하루를 쉴 숙소가 있다는 것은 포근한 안식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드디어 비자가 나온 주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기념으로 닭고기를 사서 한 턱을 쏜다고 분주하다. 오늘 저녁은 닭갈비 파티다. 오랜만에 고춧가루 팍팍 든 음식을 먹으니 배속이 요란해진다. 산미겔시장에서 엠의 휴대폰 분실 사건을 이야기 하하다 보니, 주는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휴대폰을 소매치기 당하고 왔다고 한다. 까미노에서 모든 걸 버리고 걸었던 순례자들에게도 더 버려할 할 작은 욕심들이 남아있었다. 대도시에서는 소지품을 조심하라는 가이드북의 충고가 틀린 말이 아니었음에 씁쓸하기도 하고 남은 여행길에서 좀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직업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국인이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밤이 깊어간다.
까미노가 끝난 이 며칠은 아직도 여행이 아닌 듯 붕 떠있는 기분이다. 이제 남은 나의 여행길을 생각해야 하는 시간인데 말이다. 늦은 밤 혼자 있는 방에서 짐정리를 하며 여행계획을 세워본다. 까미노도 여행도 내 삶의 일부, 살아야 하는 하루다. 오늘 하루를 살고 미지의 내일을 꿈꾸는 것이 아직은 좋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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