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세계에 묻다 ①]“제초제, 주전자까지 못 쓰게 하나” 규제에 짓눌린 EU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지난달 28일 EU 집행위원회는 글리포세이트라는 제초제의 사용 기한을 18개월 연장했다. EU는 이 제초제가 발암 물질 논란에 휩싸이자 사용 금지를 검토했지만 반발이 거세져 한 발 물러섰다. 유럽회의론자들은 “제초제도 마음대로 못 쓰게 한다”며 EU를 규탄해 왔다.

#같은 달 11일에는 전기주전자와 토스터, 헤어드라이어 등 소형 가전에 대한 사용 규제 조치도 연기됐다. 당초 EU집행위원회는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져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이들 제품을 판매 금지할 계획이었지만, 차(茶) 문화가 발달한 영국에서 반발이 컸다. 규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결국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했다.

브렉시트의 원인은 뿌리깊은 반(反)대륙 정서, 이민자 범람, 높은 분담금 등 여러가지가 꼽히지만, EU의 시시콜콜한 규제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규제에 EU의 역동성이 아사(餓死)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

EU는 28개 회원국을 통합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를 도입했고, 입법ㆍ사법ㆍ국방ㆍ세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간섭이 시작됐다. 특히 최근에는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금융규제, 온난화 등을 막기 위한 환경규제, 인권보호를 위한 노동규제 등이 더욱 엄격해지는 추세였다. 영국 의회가 통과시키는 법안의 60%가 EU 집행부가 명령하거나 요구한 것이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유세 도중에는 EU 규제에 관한 온갖 괴담들이 확대재생산 되며 EU에 대한 반발심을 키웠다. EU가 콘돔이나 바나나의 길이까지 규제했다는 내용이었다. EU잔류진영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한번 자리잡은 편견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EU 규제가 그만큼 광범위하고 세세하다는 점에서 일부 괴담의 진위 여부가 큰 논리적 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유럽회의론자들은 EU 규제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일반 국민이 투표로 선출하지 않은 EU의 관료들이 각국의 제도에 이리저리 딴죽을 거는 것은 비민주적이며 관료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특히 대륙과는 다른 민주주의 역사를 밟아온 영국 국민들에게 이는 반대륙 정서를 부추기는 일이었다. 유럽회의론자들은 브렉시트가 “영국의 독립”이라고 했고, EU 탈퇴를 이끌었던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브렉시트의 의미에 대해 “영국에 대한 ‘통제력(control)’을 되찾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관료주의와 비효율성에 대한 비판은 브렉시트를 단순히 반(反)세계화, 반(反)자유주의적인 움직임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세계화의 상징인 EU를 탈퇴했다는 점과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브렉시트를 ‘고립주의’로 해석했다. 그러나 규제 탈피라는 측면에서 보면 브렉시트는 ‘큰 정부’를 개혁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움직임과 맥락이 닿는다. ‘신자유주의의 대모’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EU를 비판했던 것, 영국상공회의소(BCC) 조사에서 기업인이 절반 이상이 브렉시트에 찬성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반자유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적인 브렉시트의 모순된 모습은 브렉시트 진영이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브렉시트 진영에는 영국독립당처럼 이민자에 배타적인 극우 집단이 있는가 하면, 보리스 존슨이나 다니엘 해넌 보수당 의원처럼 이민에는 비교적 관대하고 EU 규제에는 반대하는 자유주의 집단도 있다. 국민투표 이후 브렉시트 진영의 ‘말 바꾸기 논란’이 일었던 것은 애초에 이들이 EU잔류의 이익과 EU탈퇴의 이익 모두를 취하겠다는 모순된 태도 탓도 있지만, 이 두 집단의 주장을 혼동한 탓도 크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EU 안팎에서는 비대해진 EU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통합을 향해서만 달려온 탓에 통합 과정에서 불거진 반발 의사를 수렴하거나 소외된 계층을 돌보는 것은 게을리해, 브렉시트 같은 반작용을 키웠다는 지적에서다. 유럽회의주의는 영국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나 스위스처럼 애초에 EU 가입을 거부하는 국가부터 스웨덴, 덴마크처럼 단일화폐(유로) 사용을 거부하는 국가, 국경 간 자유이동을 규정한 솅겐조약을 거부하는 국가 등 요구사항이 다양하다. 앞으로의 개혁 과정에 험로가 예상되는 이유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와 관련 3일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브렉시트 주제로 열린 콘퍼런스에서 “EU가 브렉시트 위기를 빠져나와 세계에서 주도적 위치에 올라설 것”이라면서 영국의 EU 탈퇴로 오히려 이익을 볼 수 있다고 낙관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영국의 탈퇴로 EU가 개혁이나 제반 의사결정에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이라는 점을 낙관론의 근거로 들었다. 그는 “EU 집행위원들이 앞다퉈 쏟아내던 불만은 ‘영국 때문에 사안이 너무 어려워져서 못하겠다’는 것이었다”고 상황을 소개한 뒤 “영국이 테이블에서 사라질 것이니 이제 시행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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