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세계에 묻다 ②]민주주의의 배신?…포퓰리즘ㆍ책임전가의 들러리 된 국민투표

[헤럴드경제=이수민 기자]#55% vs 45%. 2014년 9월 영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끊임없이 독립을 외쳐 온 스코틀랜드가 주민투표까지 벌여가며 영국과의 이별에 나선 판이었다. 부결된 주민투표 결과로 영국은 별탈없이 연방을 지킬 수 있게 됐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61% vs 39%. 2015년 7월 그리스는 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 수용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를 벌였다. 긴축에 지친 국민들은 20%포인트 이상의 차로 ‘반대’에 손을 들어줬다. 유로존은 전에 없던 긴장에 휩싸였다. 하지만 긴축이 없으면 지원도 없다는 유럽연합(EU)에 밀려 결국 다시 한 번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섰다. 국민투표는 일종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다.

#51.9% vs 48.1%. 2016. 6월. 영국은 EU와의 결별을 선택했다. 영국은 물론 EU, 전후 세계질서를 완전히 바꿔 버리는 순간이었다. 국민투표의 힘은 컸다. 하지만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영국의 표정은 하얗게 질렸다. 영국인들조차 “우리가 무슨 일을 한 거지”(What have we done)라며 후회했다. ‘리그렉시트’(브렉시트 후회)라는 말도 모자라 ‘exit 브렉시트’(브렉시트 탈출)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국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 정치의 꽃이다.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에서 국민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된 게 국민투표다. 민주주의의 방법론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은 다수결의 원칙도 국민투표의 기본을 깔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민주주의 배신을 경험하고 있다. 국민투표가 외부 세력에 대한 ‘협상용’으로 남용되는가 하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선전장이 되고 있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 꽃이라는 국민투표가 오히려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

‘벼랑끝 협상 전략’으로 전락한 국민투표= 국민투표가 마치 유행병처럼 돌고 있다. 툭하면 국민투표다. 정치인들간 알력 싸움 혹은 협상으로 원하는 바를 관철시킬 수 없을 때 ‘국민들의 뜻’은 정당성과 힘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등을 겨냥해 국민투표를 벌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컸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채권단에 대한 협상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며 ‘반대’에 표를 던지라고 부추겼다. 결과적으로는 채권단이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목적 달성에 실패했지만 수단적 의미의 국민투표를 보여준 선례로 남았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총리 역시 벼랑끝 전술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EU에서 얻어낸 전리품도 상당했다. 브렉시트 진영의 승리를 막기 위해 EU는 당근을 제시하며 적극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 2월 EU 개혁안 통과가 대표적이다.

혼돈 속에서 좀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브라질에선 직무가 정지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렉시트 이후 체코 등 가뜩이나 EU가 마땅치않게 여겼던 유럽회의론자들은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자고 종용하고 있다. 지난 4월 유전 기한 연장 폐기 여부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이탈리아는 오는 10월엔 상원의 특권 제한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또 실시한다. 이번 국민투표엔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의 명운도 걸려 있다.

[자료=123rf]

포퓰리즘ㆍ책임전가의 들러리 된 국민투표= 국민투표는 무엇보다 정치적 책임의 주체를 간단하게 ‘국민’으로 바꿔버리는 마법을 가진 도구가 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브렉시트 진영에서 ‘말 바꾸기’ ‘공약 뒤집기’ 논란이 끊이질 않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책임전가 마법이 가능한 것은 국민투표가 포퓰리즘의 들러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근거와 논리를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유권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에 편승한 영합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가 그렇다. 영국인들만의 영국을 만들며 주권을 되찾고, 이민자들을 위해 돈을 쓰지 않겠다는 구호에 힘을 실어주며 탈퇴 분위기를 이끌었지만 브렉시트를 택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지, 치러야 할 비용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은 부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 결과를 ‘민주주의의 결과’라며 위안 삼는 것은 위험한 대처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모든 문제를 유권자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브렉시트 투표 후 일각에서는 특정 사안의 경우 국민투표가 오히려 반(反)민주주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계론까지 대두됐다. 심지어 국민투표가 한 나라는 물론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도박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WP 웡크블로그는 최근 ‘브렉시트가 어떤 일은 국민투표로 결정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다’라는 글에서 복잡한 영향을 초래할 결정을 단순한 국민투표 찬반으로 정하는 것은 끔찍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를 전했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A. 벨은 4년 전 정치전문 주간지 뉴리퍼플릭 기고문에서 국민투표를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과 같은 주권에 관한 문제와 선출된 입법부가 다룰 수 있는 문제에 관한 것으로 구분하면서 전자는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 타당하지만, 후자의 경우 기술적, 전문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입법부가 다루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투표로 결정하기 적합한 사안에 대해서만 투표를 시행해야 민주주의를 해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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