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이어가 뿌린 이라크전 씨앗…테러·난민·고립주의를 낳다

英 ‘이라크전 진상조사 칠콧보고서’
“WMD 제거위해 美와 참전했다지만
對이라크 정보달라 성급했다” 지적
블레어 “세상 더안전해져…옳았다”

“토니 블레어는 거짓말을 했고, 수천명이 죽었다” 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애드미럴티 하우스 앞에서는 이같은 구호가 울렸다.

2003년 영국과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블라이어(Bliar)”라 적힌 피켓을 들고, 전쟁을 결정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규탄했다. 블라이어는 ‘블레어’(Blair)와 ‘거짓말쟁이(liar)’를 합성한 말이다.

같은 시각 하우스 안에서는 이라크전에 대한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됐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6일(현지시간) “이라크전은 잘못된 정보 판단들에 기반해 결정됐다”는 내용의 칠콧 보고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날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믿는다”고 항변했다. [런던=EPA연합]

조사위원회를 이끈 존 칠콧 위원장은 이날 2009년부터 7년 동안 수행한 조사 결과를 12권짜리 최종보고서에 담아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영국이 2003년 이라크전에 참전해 2009년 철군할 때까지 블레어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이 담겼다.

보고서는 블레어가 당시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의 주도에 이끌려 전쟁에 참가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블레어는 2002년 부시에게 “무엇이 됐건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는 메모를 보냈는데, 이는 전쟁 수행 여부 권한을 미국에 사실상 모두 넘겨준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유럽 다른 나라들은 모두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블레어는 ‘부시의 푸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보고서는 또 이라크는 영국에 “어떠한 임박한 위협”도 아니었으며 “이라크 정책은 잘못된 정보 판단들에 기반해 결정됐다”고 결론내렸다. 대표적인 것이 대량살상무기(WMD)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WMD를 제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홍보했지만, 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블레어 정부는 이라크전으로 발생할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이라크전에서 영국군은 179명이 전사했고, 미국인도 4500명 이상 사망했다. 이라크인은 무려 15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블레어는 군비축소에 대한 평화적인 선택지를 다 써보기도 전에 영국을 전쟁으로 이끌었다”며 “당시의 군사 행동은 마지막 수단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쟁의 비극은 단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라크 침공은 중동 정세를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다. 중동은 다양한 종교 분파와 민족이 공존해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는데 이라크전은 불안의 기폭제가 됐다. 테러단체 알카에다는 이라크의 혼란 덕분에 세력 기반을 확보했고 이는 결국 IS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유럽이 현재 겪고 있는 테러와 난민 문제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것이다. 지난 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250명의 사망자를 낸 테러는 그 한 파편일 뿐이다.

이라크전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불고 있는 ‘고립주의’ 바람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국이 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난민을 포함한 이민 문제와 그로 인한 테러 위협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미 2013년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 폭격과 2014년 IS 폭격을 진행하자는 미국의 요구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 보고서로 인해 향후 영국의 정책 결정 방향이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역시 공화당의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국제 문제에 관여하는 대신 자국의 문제에 집중하자는 ‘미국이 먼저다(America First)’ 슬로건을 앞세우고 있다. 그는 이미 유세 과정에서 “이라크에는 WMD가 없었고 전쟁론자들은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을 여러차례 한 바 있다.

보고서가 공개된 뒤 블레어는 “나는 옳은 결정을 했다고 믿는다. 세상은 이라크전 결과로 더 나아졌고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라고 했다. 부시 역시 “사담 후세인 없는 세상이 더 살기 좋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다”며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블레어를 전범(戰犯)으로 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칠콧 위원장은 “이 문제는 단순한 블레어에 대한 조사를 넘어서서 적절하게 구성된, 국제적으로 공인된 재판소에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보고서로 인해 영미에서 논란이 시끄러운 것과는 반대로 정작 이라크에서는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반응이 조용하다”고 WP는 전했다. 2003년 바그다드에서 후세인 조각상을 커다란 망치로 내리쳐 이름이 알려진 카드힘 샤리프 하산(60)은 “후세인이 물러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라크 상황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영국과 미국은 오직 죽음과 파괴만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김성훈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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