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가을 흔적’①] 밟으면 신발에 악취…보름 빨라진 ‘은행 지뢰밭’

은행 열매 떨어지는 시기…예년보다 10~15일 가량 당겨져

‘폭염 이유’ 여름기온 높고 일조량 많아 생육 빨라졌기 때문

은행 열매 냄새는 종자 지키기 위한 독성물질에서 유래돼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 가을 풍경에서 울긋불긋한 단풍나무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막간 점심시간을 틈타 은행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밑을 거닐면 업무 시간에 받은 스트레스도 약간은 풀리는 느낌이다. 그러나 은행잎과 함께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은행 열매의 냄새다. 올해는 여름 내내 작열한 태양과 높은 온도로 이 불청객이 보름 가량 일찍 찾아왔다.

직장인 이모(28) 씨는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서자 마자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둥그런 물체가 밟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쿰쿰한 냄새가 이 씨의 코를 찔러왔다. 이 씨의 신발 밑창에서 발견된 냄새의 주인공은 처참하게 으깨진 은행 열매였다. 이 씨는 “9월도 다지나기 전에 웬 은행이 있나”라고 중얼거리며 신발에 들러붙은 열매의 잔재를 나뭇가지로 덜어냈지만 점심시간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는 은행 냄새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쳐야 했다. 

가을철 은행나무의 노란 빛깔은 낭만적인 풍경이지만 은행 열매의 고약한 냄새는 그 낭만마저 깨뜨린다. 올해 여름철 강한 햇빛과 높은 기온으로 은행 열매가 열흘에서 보름 가량 빨리 떨어졌다. 사진은 서울 도심 인도에 떨어진 은행 열매. 박현구 [email protected]

올해는 평소보다 이른 9월 중순부터 은행나무 열매가 열리기 시작해 추석 직후부터 도로 곳곳에 ‘냄새 지뢰’를 깔아 놨다. 기상청 관계자는 “여름철에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적으면 은행나무 열매가 빨리 익는 경향이 있다”며 은행 열매가 빨리 익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은행나무는 공기 정화 효과가 뛰어나고 병충해에도 강하며,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들어 미관상으로도 좋다. 이에 서울시를 비롯해 각 지자체는 도심 곳곳에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2014년 기준 서울 시내 가로수는 29만3389그루. 이 가운데 은행나무는 11만4060그루고, 이 중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는 3만376그루다.

문제는 열매가 떨어지는 매년 10월 초가 되면 고약한 열매 냄새가 난다는 것. 은행 열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빌로볼(Bilobol)과 은행산(nkgoic acid)라는 과육 내 독성 성분이다. 빌로볼은 옻나무에도 들어있는 성분으로 피부염을 일으킨다. 은행나무는 이 독성 물질을 통해 동물이나 곤충 등으로부터 종자를 지킨다. 은행 열매의 고약한 냄새가 방어 수단인 셈이다. 덕분에 은행나무는 병충해에 강해 가로수로 선택받았다.

현행법상 지자체 소유물인 은행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거나 주워갈 경우 절도죄나 점유이탈물횡령죄로 처벌받는다. 과거에는 노인들이 은행이나 도토리 열매 등을 훔쳐가는 게 문제가 된 적도 종종 발생했다. 2000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은행이 건강에 좋다고 들은 60대 남성이 몰래 은행을 15㎏이나 채취하다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은행 냄새로 인한 민원이 증가하자 최근에는 지자체가 나서서 “떨어진 은행을 주워가라”며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고의로 또는 몰래 가로수를 훼손해 가며 대량으로 따 가는 게 아니라 주워가는 정도라면 문제 삼지 않는 형편이다. 서울시의 경우 각 구청이 주민들과 함께 열매 떨이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트에만 가면 은행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이미 밟혀서 냄새를 풍기는 은행을 누가 주워 가냐”는 것이 대다수 시민들의 반응이다.

이에 서울시는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등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있는 암나무들을 2017년까지 매년 300그루씩 수나무로 교체하는 작업 하고 있다고 밝혔다. 새로 심는 가로수 역시 DNA 검사를 통해 수나무를 골라 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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