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의 영화X정치]‘곡성’과 ‘음모론의 정치학’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곡성’은 ‘미궁’이다. 영화 ‘곡성’은 출구를 찾을 수 없도록 설계됐다. 실체적 진실을 마지막까지 숨긴다.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숨겨진 진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하고 합리적으로 논증가능한 물리적 진실은 없다. 퍼즐처럼 ‘사실’의 조각들을 헤아려 진실을 규명하려는 관객의 시도는 이내 필히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진실이 없으나 진실이 있는 것처럼 현혹해 그것을 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존재 이유도, 성공 이유도 있다.

▶영화의 현혹, 질문 바꿔치기…”무엇이 진실인가“ VS ”누가 귀신인가“

평화로운 한 마을을 덮친 연쇄적인 죽음은 무엇 때문일까?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을 중간에 교묘히 바꿔치기 한다. ‘누가 귀신이고 누가 사람인가?’. 이후 죽음의 비밀을 둘러싼 의문은 귀신과 인간, 악마와 천사를 가려내는 퀴즈게임이 된다. 이 질문의 바꿔치기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현혹’이다.

슬쩍, 그러나 전면적으로 질문의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장면이 있다. 잘 알려진대로 주인공인 경찰 ‘종구’가 (악령에 들린 듯한) 딸 ‘효진’(김환희 분)과 대화하는 대목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아빠의 말에 딸은 “뭣이 중헌디?”라고 되묻는다. 경찰 종구는 이후 일본인(쿠니무라 준 분)과 무속인 ‘일광’(황정민 분), 정체불명의 소녀 ‘무명’(천우희 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누가 귀신과 인간 가려내기, 악령과 천사를 구별하기 게임 속으로 빠진다.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임이다. 경찰 종구에게 중요한 문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점점 더,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가 돼 간다. 영화가 흘러갈수록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의문을 스크린 바깥으로 쫓아낸다. 믿음에는 논증도 증명도 필요없다. 믿음의 체계에서는 실재하는 사실, 물리적인 진실은 의미가 없다. 

▶경찰 종구의 실패, 공권력의 실패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주인공인 종구의 직업이 경찰이라는 점이다. 그는 이 마을의 유일한 공권력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 더 상위의 공권력이 내린 결론, “연쇄살인은 독버섯 중독으로 인한 광증(狂症) 때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독버섯 중독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타당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합리적 의심일 터인데, 이상한 것은 공권력을 상징하는 종구가 합리적 의심을 합리적 수사로 이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버섯 중독으로 인한 정신착란으로 과연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의 여부는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증 가능한 일일텐데, 영화는 이러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이어지는 연쇄살인에서 살인자와 피살자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도 전혀 수사대상이 되지 않는다. 으레 있기 마련인 치정, 원한, 재산, 학대 여부 등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수사조차 이뤄지지 않거나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들을 성공적으로 망각하게 하거나 무시하도록 한다.

경찰복을 입은 종구의 모든 시도는, 진실을 밝히거나 딸을 구하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딸의 살인 현장에 내버려진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공권력의 실패’에 바탕하고 있다.

이 영화 뿐이 아니다. 최근 우리 영화가 거둔 대대적인 성공의 이면엔 정치의 실패, 공권력의 무능이 있다. ‘곡성’과 ‘부산행’, ‘터널’이 그렇다.

▶공권력의 실패, 음모론의 창궐

공권력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무엇일까. ‘음모론’이다. 경찰 수사가 실패한 마을의 사람을 현혹한 것은 일본인과 무속인, 소복입은 소녀의 망령이었다. ‘곡성’은, 공권력이 무너진 자리에 창궐하는 것은 ‘음모론’이라는 사실과 함께 공권력은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흔히 ‘음모론’에 집착한다는 사실 또한 드러낸다.

그렇게 읽는다면 관객들이 ‘곡성’을 우회해 맞딱드리는 것은 우리 사회,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음모론과 음모론이 쟁투하는.

최근 들어 청와대와 정부, 검찰 등 통치권력을 둘러싸고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 때마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는 “국기문란” “국정 흔들기” “기득권과 일부 이념세력ㆍ언론의 음모”라고 대처했다. 의혹이 불거지는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수사와 진실 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느 하나 국민이 시원하게 납득되도록 사태가 파헤쳐지는 사례는 전무에 가깝다. 공권력이 무능하거나 회피하거나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이에 따라 또 다른 의혹도 제기된다. 사법ㆍ행정ㆍ입법 그리고 언론까지 권력의 배후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모종의 시스템, 음모에 대한 의혹이다. 영화 ‘내부자들’이 그려낸 바다.

▶음모론의 정치학

음모론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사회학자 전상진 교수(서강대 사회학과)의 저서 ‘음모론의 시대’를 참고할만하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의 질문에 답한다. ‘사람들은 왜 음모론에 매혹되는가’와 ‘정치가들은 왜 음모론을 이용하는가’이다. 하나가 신념 혹은 문화로서의 음모론이라면 또 한편은 정치 전략 혹은 동원이데올로기로서의 음모론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이론에 따르면 음모론은 기대와 현실간의 간극으로부터 비롯된 불공정, 불만족, 부정의, 불평등으로부터 생긴다.자신의 행동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고통을 유발하며, 고통은 설명되어야 한다. 기대와 현실, 행동과 결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고통을 극단적인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하려는 의미체계가 바로 음모론이다. 막스 베버의 용어를 빌자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설명하는 ‘신정론’인데, 음모론은 모든 복잡한 현상의 탓을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착시키는 세속적 신정론인 셈이다. 여기서 단 하나의 원인이 바로 음모집단이며 절대악이고 응징해야 할 죄인이다.

음모론은 단순하고 명확하며 극단적으로 논리ㆍ합리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또 음모론은 강자의 통치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약자의 무기도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책은 “음모론은 현대 정치의 중요한 전략이자 자원이 되었다. 지지자 동원에 효과적이고 정적 공격에 유용하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는 데 쓸모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음모론은 통치체제를 유지하는데도 쓸모가 있지만 약자의 저항수단으로서도 유효하다. 음모론의 유형은 여러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통 음모론’은 흔히 지배와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정치전략이다. 그 반대쪽엔 ‘이단 음모론’이 있다. 기득권자와 기존 체제를 바꾸려는 약자의 정치전략이다. 그래서 ‘정통 음모론’은 ‘통치 음모론’이며, ‘이단 음모론’은 ‘저항 음모론’이다.

책은 “정통과 이단의 음모론은 모두 ‘예외적이고 특별한 희생자’를 특권화하고 ‘모든 비난받을 일’에 책임이 있는 ‘적’을 ‘비인간적이고 전능하며 악의 현신’으로 악마화한다”고 두 음모론간의 공통점을 지적한다. 때로는 정통 음모론과 이단 음모론이 결합되기도 한다. 모든 음모론이 지닌 위험성이다. 그 결과 정치권력은 책임으로부터 달아난다. 

▶음모론과 합리적 의심

그렇다면 모든 음모론을 배척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기본적으로는 음모론이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할까? 왜 서민들은 고통을 겪을까? 왜 불평등은 커져 가는가? 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날까?

문제는 음모론이 흔히 올바른 질문에 그릇된 답변을 결합시킨다는 데 있다. 이를 테면, 자본가 때문에, 빨갱이 때문에, 일본인 때문에, 한국인 때문에, 자본가 때문에, 노동자 때문에, 유대인 때문에 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당 때문에, 야당 때문에, 청와대 때문에, 국회 때문에 등등. 그러나 그릇된 답변으로부터 올바른 질문을 구해낸다면 음모론은 정당한 비판이론이 될 것이라는 게 책의 결론이다. ‘곡성’의 경찰 종구가 현혹됐던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 대신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물음을 지키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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