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소수자가 되는 건 순식간…색안경만 안 끼면 된다”

[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영화를 찍고 나서 길 가다 노인만 보이면 고개를 돌리고 그랬어요.”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소영’은 공원에서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는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할머니다. ‘박카스 할머니’라고 불린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나랑 연애 할래요?”라고 운을 띄우고, 관심을 보이면 “하나 딸까요?”하면서 가방에서 박카스 한 병을 꺼낸다. 종로 탑골공원 일대의 할아버지들 사이에서는 서비스가 좋다 해서 ‘죽여주는 여자’로 통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던 할머니가 정말로 ‘죽여주는 여자’가 됐다. 중풍에 걸려 정신은 멀쩡한데 똥오줌을 가리지 못해 사는 게 괴로운 할아버지, 치매에 걸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서는 더 살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 자식과 아내를 잃고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 할아버지가 죽는 것을 도와준다. 딱한 사정에 고개 돌리지 못하는 “이 여자는 천사”(배우 전무송이 윤여정에게 한 말)다. 두 가지의 ‘죽여주는 여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69)을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CGV아트하우스 제공)]

“정말 이 여자는 ‘죽여주는 서비스’를 하는 거예요. 너무 깨끗하고 팁도 많이 주고 잘 해주던 할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정신은 멀쩡한테 한 발짝 움직이지도 못하는 걸 보고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요. ‘오래전에 나도 죽고 싶었지만 나는 못 죽였다, 이 할아버지는 정말 죽여주는 거다’ 같은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에게는 살인이 아니에요, 죽여주는 서비스인 거죠.”

최근 그는 노년의 삶을 다룬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tvN)와 영화 ‘계춘할망’(감독 창감독)에 연이어 출연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보다는 한층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아지고, 동년배 노인들의 힘겨운 삶도 알게 됐다.

“이를 계기로 내가 일어나서 인권 운동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겨우 ‘안 볼 거야’하면서 비겁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밖에 못 하더라고요. 알고 지내는 한 설치미술가에게 ‘난 이것밖에 못한다’고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보시하는 거래요. 나서서 돈 걷고 그런게 아니어도 된대요.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화가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출연이 꺼려질 법도 했지만 그는 “이재용 감독을 믿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일이 유쾌하기도, 다양한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이야기도 따듯해 보인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길에서 아이를 덥썩 데리고 집에 들어온 소영이를 대하는 이웃 사람들의 태도였어요. 티나가 아이를 보고 “걔는 또 뭐야” 이러잖아요. “길에서 주워 왔어”라는 소영의 대답에 그 이상 아무것도 안 묻잖아요? 인생이 아프고 그런 사람들은 남한테 시시콜콜 안 물어봐요. 나는 어떤 사람이 이혼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왜 이혼했냐고 안 물어봐요. 감독이 소외된 사람들끼리 사는 모습을 잘 썼다고 생각했어요.”

극중 소영이 사는 서울 이태원 보광동 골목 집주인은 티나(안아주)라는 트렌스젠더 바의 마담이고, 함께 세 들어 사는 사람은 다리 한 쪽이 절단된 장애인 도훈(윤계상)이다. 소영이 “길에서 주운”아이인 민호(최현준)는 코피노다. 

[사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CGV아트하우스 제공)]

극중 트랜스젠더 티나로 등장한 배우는 실제 트랜스젠더기도 하다. 이재용 감독은 처음 이 역할에 여성적인 이미지의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를 고려했지만, 양쪽 모두 리얼리티가 살지 않아 고민 끝에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다. 여기에 우리나라 트랜스젠더 1세대인 안아주가 캐스팅된 것. 티나는 “나 같은 사람들도 천국 갈 수 있댔거든?”이라고 퉁명스레 말해도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다.

“이재용 감독이 잘 했다고 생각하고 보람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VIP 시사회 때 안아주씨가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똑똑한 여자더라고요. 자기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보여주고 알릴 기회를 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열심히 했다고 이야기했어요. 일본만 가도 트랜스젠더가 샵에서 일하고 세일즈하고 다 하는데, 우리나라는 술집에 나가서 하는 일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대요.”

젊었을 때 외국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있는 그도 “소수자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며 그 때를 회상했다. 

[사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 (CGV아트하우스 제공)]

“소수자가 되는 건 순식간이에요. 내가 미국과 호주에서 살 때 70년대만 해도 국민학교 애들이 쫓아왔어요. “차이니즈, 재패니즈” 하면서 눈을 찢는 제스쳐를 하면서요. 거기 할머니들은 “너희 나라 하늘도 우리나라 하늘과 똑같냐”는 질문도 했어요. 소수자였던 거죠. 소수자에게는 뭘 하는지 도와줄 필요 없어요. 색안경만 안 끼면 되는 거에요. 이상하게만 보지 않으면 돼요.”

젊은 관객들에게 ‘죽여주는 여자’의 메시지가 와 닿을지, “그런 고민은 없다”고 말했다. “저절로 알게 돼요. 지금 젊은 나이에 어떻게 죽을 것이냐 고민한다면 그건 자살밖에 없으니 권장하고 싶지 않아요. 각자 생각의 몫은 다른 거니까요.”

한동안 브라운관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영화 무대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 것은 2010년 ‘하녀’(감독 임상수) 때부터였다.

“이제는 TV, 영화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많이 하고 있어요. 환갑 넘어서 결심했죠. 제가 부자는 아니지만 나한테 보상해주고 싶었어요. 일 하는데 사치스럽게 하자고요. 출연료 때문에 일을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감독과 작가와 작업하는 게 제 사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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