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기의 대중문화비평] 양보할 수 없는 청순…6년차 에이핑크의 ‘핑크빛 순정’

정규 3집 ‘Pink Revolution’ 발매
다른 걸그룹과 달리 한 색깔 고집
‘청순돌 롤모델’로 성장, 롱런 행보
장르적 시도·음악적 성숙이 비결

아이돌 그룹의 시효는 언제까지일까? 1996년 데뷔한 1세대 아이돌 HOT는 4년8개월간 활동했다. 이후 한동안 아이돌은 4~5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왔다.

지금은 아이돌 생태계가 많이 달라졌다. 멋있기는 한데 립싱크를 하기도 해 한계를 보여준 초기 아이돌들이 이제는 음악 실력과 퍼포먼스 등에서 월등한 기량을 선보이며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항상 아이돌의 능력치 이상을 보여준 빅뱅은 최근 10주년을 넘겼다. 빅뱅의 10주년 기념 상암공연장은 한국 아이돌의 생생한 역사를 체험하는 국제적 현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불과 3년 활동하고 2000년 해체했던 젝스키스가 16년만에 단독콘서트를 열고 컴백했고 곧 신곡을 발매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이전에도 god의 컴백, 최장수 아이돌 그룹 신화의 활동 등이 있었다.

걸그룹의 경우는 남자 아이돌그룹 생태계와는 많이 다르다. 초기 걸그룹의 생명은 보이그룹보다 훨씬 짧았다. 음반 구매층이 여성이 많다보니, 걸그룹은 여성팬을 베이스로 하는 남자아이돌에 비해 행사용이 위주인 경우가 많았고, 그 역할마저 젊고 발랄한 어린 후배들이 나오면 그들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2007년 등장한 10년차 소녀시대는 걸그룹도 장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밴드로 변신한 원더걸스도 9년간 이어졌다. 걸그룹도 남성뿐만 아니라 ‘여덕’(여성덕후)이나 걸크러시로서의 여성팬을 끌어들여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확실한 음악적 색채나 두드러진 콘셉트가 없다면 어리고 젊은 친구들이 계속 나오는 걸그룹 시장에서 장수할 도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때 2011년 데뷔한 6년차 걸그룹 에이핑크는 섹시나 여전사, 센 언니, 걸크러시 등 유행에 따라 그때그때 콘셉트와 이미지를 바꿔나간 다른 걸그룹과 달리 오로지 청순함과 밝음으로만 승부해 자신만의 색채가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걸그룹이 10년은 갈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는 특수한 경우다. 수많은 걸그룹들은 대중의 감성을 움직일만한 롱런전략을 짜지 못하면 금세 사라지거나, 이름만 유지하는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어리고 젊은 후배들이 계속 나오면, 아직 젊은 선배 걸그룹들도 금세 나이가 들어 보이고 마는 게 걸그룹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보이그룹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수지는 아직 우리 나이로 23살인데도 7년차 걸그룹 미스에이가 벌써 중년(?) 느낌이 난다는 말이다. 2009년 데뷔한 포미닛이 멤버들이 아직 젊은 연령대인데도 해체된 것 역시 걸그룹 조로현상과 관련이 있다.

확실한 음악적 색채나 두드러진 콘셉트가 없다면 어리고 젊은 친구들이 계속 나오는 걸그룹 시장에서 장수할 도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때 2011년 데뷔한 6년차 걸그룹 에이핑크는 롱런할 수 있는 음악적 행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첫선을 보일 때만 해도 SES 등 1세대 걸그룹의 느낌이 조금 났지만, ‘노노노’ ‘미스터 추’ ‘러브’ ‘리멤버’ 등을 거치면서 에이핑크만의 걸그룹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노노노’‘미스터 추’때만 해도 훅 속에 깜찍, 발랄을 얹은 듯했지만, ‘러브’에서는 여성스럽고, 성숙한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에이핑크의 전체 느낌을 상징하는 단어는 ‘청순돌’이다. 에이핑크의 영원, 순수, 청순 이미지는 걸그룹 시장에서 강한 팬덤을 형성하게 했다.

걸그룹 트렌드가 섹시 일변도로 가면서 그것으로 재미를 보고 있을 때에도 한번도 노출하지 않고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어 샤방샤방함을 유지했다. 남들이 다 섹시니 뭐니 하면서 콘셉트를 바꿔나갈 때에도 좌고우면 하지 않고 청순함을 지켜나가는 것은 음악성으로만 어필되지 않는 걸그룹 시장에서 위험부담이 있다.

오하영이 “섹시를 절대 안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에이핑크가 섹시를 콘셉트로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만약 오하영과 손나은이 유닛 활동으로 기존 에이핑크 분위기를 바꿔나오는 도발을 감행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에이핑크라는 우산속에서 섹시 품목은 어울리지 않는다.

섹시나 여전사, 센 언니, 걸크러시 등 유행에 따라 그때그때 콘셉트와 이미지를 바꿔나간 걸그룹은 오히려 정체성이 약화된 반면 오로지 청순함과 밝음으로만 승부한 에이핑크는 자신의 색채가 분명해졌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걸그룹 시장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됐고, 이는 장수할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했다.

에이핑크가 여자친구나 트와이스, 러블리즈, 에이프릴 등 요즘 걸그룹 사이에서 가장 많이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또한 에이핑크는 청순함을 내세우는 많은 이들 후배 걸그룹과는 차별된, 6년차로서 노련하고 성숙된 청순돌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정은지는 “우리 이후 청순 걸그룹이 많이 나와 뿌듯하다”고 했다.

이번에 발표한 에이핑크의 정규 3집은 장르적 시도를 많이했다. 정은지는 “후크송의 느낌보다는 멜로디가 예쁜 음악, 성숙된 음악을 원했다. 음악 자체가 좋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사에도 참여한 박초롱은 “앨범을 낼때마다 우리 색깔을 넣고 있다. 이번에도 변화와 성장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귀에 쏙쏙 박히는 음악보다는 좋은 음악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제작자가 들으면 싫어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타이틀곡인 미디엄 템포의 알앤비 댄스곡 ‘내가 설렐 수 있게’는 실제로 그 말에 딱 부합되는 노래다. 이 노래는 음원차트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안정적으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음악적 트렌드를 좇아 가볍게 갈 수도 있지만, 좋은 음악, 예쁜 음악, 따뜻한 음악 느낌이 나는 수준 있는 노래를 내놨다. 걸그룹 에이핑크는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지만 장수의 기운이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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