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는 의로운 죽음 ①] 각박한 세상의 등불인데…까다로운 ‘의사자 선정’

-복지부, ‘구조행위’ 소극적 해석… 의사자 문 좁아

-뺑소니 차량 추격하다 다친 택시기사 불인정해

-‘초인종 의인’ 안치범 씨 의사자 여부는 이달 결정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 2012년 2월, 새벽운행에 나선 택시기사 이모 씨는 도로에서 충돌사고를 내고 도주하는 뺑소니 차량을 목격하고 곧바로 뒤쫓았다. 음주 상태였던 뺑소니 차량 운전자 김모 씨는 역주행도 불사하며 막무가내로 도망갔다. 이 씨는 더 이상의 도주를 막기 위해 뺑소니 차량으로 돌진하다가 눈 내린 도로에 미끄러져 공중전화 박스를 들이박았다. 이 사고로 척추가 손상된 이 씨는 병원에서 장애진단서를 발급받았다.

이듬해 이 씨는 뺑소니 사고의 범인을 잡으려다가 부상을 입었다며 의사상자 신청을 했지만 보건복지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씨의 행위를 의사상자법상 구조행위로 보기 어려운데다 이 씨의 운전 중 본인 과실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보건복지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이 씨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8월 이 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보건복지부보다 ‘구조행위’의 의미를 더 넓게 해석했다.

보건복지부는 이 씨의 추격이 단순히 범인을 검거하는 행위였을 뿐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적극적 행위로 볼 수 없어 의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법원은 “뺑소니 피해자들을 위해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경우도 구조행위에 포함해야 한다”며 “반드시 피해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만 한정해선 안된다”고 했다. 이 씨가 택시 영업을 포기하고 추격에 나선 점, 김 씨의 위험한 운전으로 사고가 난 점도 판결에 반영됐다. 

[사진설명=각박한 세상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의사상자에 대한 인정이 너무 까다롭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관련 이미지.]

이 씨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일에 나섰다가 다치거나 사망한 경우 보건복지부는 의사상자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의사상자 인정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하지만 의사상자로 인정받기까지 문이 좁고 정부 역시 이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박성중 새누리당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1~2015년 의사상자 신청 건수 244건 중 인정 건수는 142건으로 인정률이 58%에 그쳤다. 특히 지난해 법 개정으로 ‘의사자 재신청 및 이의신청’ 제도가 생겨 평년보다 많은 72건이 신청됐지만 정작 인정받은 인원은 평년보다 적은 21명(29.1%)에 불과했다.

의로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외면받은 이들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행정소송에 나서고 있다. 보건복지부 심사에서 탈락한 택시기사 이 씨 역시 소송을 통해 비로소 4년 만에 의상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불길 속에서도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던 ‘초인종 의인’ 고(故) 안치범 씨의 의사자 지정 여부가 이르면 이달말 결정된다.

지난달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발생한 화재 당시 안 씨는 잠자던 주민들을 깨우다 정작 자신은 연기에 질식해 끝내 숨을 거뒀다.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긴 그의 의로운 죽음에 유족과 지자체는 의사자 지정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화재 당시 안 씨의 구조행위를 입증할 구체적 물증이 부족해 의사자 지정에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안 씨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CCTV 영상은 있지만 건물 안에서 그가 벌인 구조행위를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은 없기 때문이다.

판례에 비춰보면 법원은 사망 과정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목격자들의 진술과 담당 경찰관의 변사사건 처리 기록 등을 근거로 의사자를 인정하고 있다.

안 씨의 경우 당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의 진술과 안 씨의 구조로 생존한 이웃주민들의 증언이 의사자 지정에 주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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