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의 영화X정치]‘부산행’, ‘좀비감염’의 병사일까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일까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에서는 시위중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숨진 고(故) 백남기 농민 사건을 풍자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장면이 있다. 서울 전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자 경찰이 일부 도심을 봉쇄하고, 이때문에 안전지대로의 피신이 불가해진 비감염 시민들이 차벽을 뛰어넘으려 하자 경찰이 물대포로 공격하는 장면이다.

‘서울역’은 영화 ‘부산행’의 프리퀄이나 ‘외전’격인 작품이다. ‘부산행’은 한국영화에서는 흔치 않게 좀비를 다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한국 전역에 좀비가 확산되는 몇 시간 동안의 서울발 부산행 KTX 객차 내 승객들의 급박한 상황을 그렸다. 서울역에서 좀비 감염자가 KTX에 탑승하게 되면서 빠르게 증가하는 객차 내 좀비들과 이를 막으려는 승객들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다. 


▶‘부산행’이 보여주는 한국사회의 민낯
이 작품에서 정부는 확산되는 좀비 바이러스에 전혀 대처하지 못한다. 국민들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좀비들뿐 아니라 좀비를 피하려는 비감염 국민들까지도 ‘폭도’로 규정해 공격한다.

재난ㆍ재해 상황에서의 대처시스템 부재, 엉뚱한 곳에 화살을 돌려 국민들을 오히려 궁지로 몰아넣는 정부의 무능과 불통 등 최근 한국 영화에서의 풍자와 흥행 코드가 담겼다. 또다른 한국영화 흥행작 ‘터널’에도 담긴 바다. 박근혜 정부들어 일어난 일련의 사고와 재난이 영화에 영감이 됐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세월호 침몰사건과 메르스 사태 등을 떠올리지 않고 이들 영화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현실이 답답하니 이들 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일텐데, 현실이 워낙 극적이어서 그런지, 영화가 현실을 다루는 태도도 노골적이고 단선적이다. 비유는 깊지 못하고 풍자나 비판은 날카롭지 못하다. 정부와 정치권의 행태는 코미디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재난의 위협은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우며, 청와대를 둘러싼 음모론은 스릴러보다 더 은밀하고, 국민들의 삶과 재난의 피해자들의 삶은 멜로보다 더 비극적이니, 영화의 상상력이 실제 현실을 뛰어넘기가 더 어려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산행’과 ‘터널’이 공통적으로 암시하거나 풍자하는 한국사회의 한 가지 속성은 ‘권력과 자본의 결탁’ 양상으로 인한 재난ㆍ재해의 발생이다. ‘터널’에서는 터널 붕괴의 원인이 기업 이윤 극대화를 위한 부실시공이었다. 터널 붕괴 매몰자의 구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역시 기업 이윤 보호 등 경제 논리였다. ‘부산행’에서 주인공 석우(공유 분)의 직업을 통해 좀비바이러스의 발생 및 창궐 원인을 암시한다. 바이오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이 좀비 바이러스의 원인이 됐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극중 공유의 대사를 통해 시사한다.

▶왜 ‘좀비’인가
좀비영화에서는 흔히 좀비나 좀비 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을 뚜렷이 제시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서구의 전통이나 문화에서는 좀비는 비밀스럽고 주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에서도 좀비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은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살짝 언급하는 정도이지 뚜렷한 인과관계로 보여주진 않는다. 애니메이션 ‘서울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좀비를 연상시키는 존재가 등장한 작품으로는 최근의 ‘곡성’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원인은 불명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나 대중문화에서는 전례가 없는 좀비가 최근 우리 영화에서 출몰하는 이유는 “기원 불명의 존재”이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덮친 비극적인 사건 사고나 재난은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발생 원인도, 책임자도 규명되지 못하고 조사나 수사가 종결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세월호 침몰사건이나 메르스사태나 가습기살균제피해사태 등 어느 하나 국민들이 속시원할 정도로 사실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규명된 것이 없다. 정치권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정치권, 검찰이 무능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회피하거나 둘 중의 한가지다.

어쨌든 국민들은 알 수 없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실 규명의 마지막 판도라 상자에는 기업의 영업상 비밀이나 정부가 말하는 국가안보상 보안사항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다. ‘좀비’가 은유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부산행’ 그 후, 바이오기업과 정부를 향한 대규모 소송전
어쨌든 ‘부산행’과 ‘서울역’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은 바이오제약회사의 신약 개발과 좀비와의 연관성을 시사한 부분인데, 그렇다면 만약 영화 속 한국을 뒤덮었던 ‘좀비 사태’가 정리된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부산행’의 후속편이 될 수도 있겠다. 아마도 ‘좀비 사태’의 이후의 한국에선 역대 최대, 지상 최다의 대규모 소송전이 벌어질 것이다. 정부와 바이오기업은 거액의 피해보상 소송을 당할 것이다. 좀비로 인한 사상ㆍ감염자들과 그들의 유족들, 건물파괴 등 재산상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로부터 말이다. 정부와 바이오기업 상호간에도 법정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정부는 좀비바이러스가 신약개발 때문이라는 사실을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아야 책임을 최소화할 수 있다. 바이오기업은 신약개발과 좀비 바이러스 발생간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것이다.

이 때 가장 바빠지는 곳은 로펌(법률자문회사)과 함께 과학자와 의사일 것이다. 바이오기업을 의뢰인으로 하는 로펌은 “신약과 좀비바이러스의 발생간의 인과관계를 확증할만한 증거는 없다”는 점의 규명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각종 과학적 데이터들이 동원될텐데, 신약 개발 과정에서 연구 의뢰를 받았던 각종 연구소들이 실험결과도 동원될 것이다.

좀비발생 원인규명 뿐 아니라 좀비바이러스 감염이나 좀비 공격으로 사망한 이들을 진단해야 하는 의사들도 사인을 어떻게 판명해야 하는지 기로에 설 것이다. 좀비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것이냐, 사망자의 평소 지병 때문이냐, 좀비 공격에 달아나다가 제 2차 충격에 의한 외인사냐.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과학, ‘청부과학’
결국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의 증언이 정부ㆍ바이오기업ㆍ보험회사ㆍ피해자들을 둘러싼 소송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과연 과학적인 양심에만 근거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역사가 증언한 것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환경ㆍ안전ㆍ보건 분야 차관보를 역임했던 데이비드 마이클스 교수(조지워싱턴대)의 저서 ‘청부과학’은, 기업의 이해와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과학자들이 얼마나 ‘과학적 사실’을 은폐ㆍ조작ㆍ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작이나 왜곡이 아니더라도 같은 과학적 실험결과가 정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교묘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도 드러낸다. 기업이나 권력의 이해에 따라 연구하고 실험하는 현대과학의 한 속성을 ‘청부과학’이라 할 수 있겠다.

청부과학은 과학에 정치적 중립이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부과학’은 담배, 석면, 벤젠, 크롬 등의 위해성이 어떻게 기업에 소속되거나 기업 후원을 받는 과학자들에 의해 왜곡됐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와 소비자 등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하게 됐는지를 추적한다.

▶‘부산행’과 가습기살균제사태, 백남기 농민 사건, 그리고 ‘청부과학’
최근 우리 사회에선 옥시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과 백남기 농민 사망 사고와 관련해 다시 ‘과학ㆍ의학적 진실’이 문제가 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에선 옥시로부터 의뢰를 받아 연구를 진행했던 대학 교수의 윤리성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언론보도나 역학조사를 통해 정상치를 넘는 피해자와 희생자가 양산이 돼도 “우리의 제품과 피해자들의사망ㆍ질환과 명확한 의학적 인과관계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기업과 “명확한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않으면 규제할 수 없다”는 정부 등 ‘청부과학’에서 다뤘던 미국에서의 양상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도 사망진단서의 사인 기재 준칙 같은 의학계의 ‘상식’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의학계에서는 기초지식이라는 사망진단서 기재 준칙이나, 똑같은 확인한 의학적 사실을 놓고도 어떻게 상반된 진술을 할 수 있는지도 드러낸다.

‘부산행’에서 언급된 바이오제약기업이, 신약 개발 연구를 하고, 실험을 하며, 정부의 허가를 시도하고, 자사의 주가를 올리기까지 과학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과학이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는, ‘청부과학’의 시대다.

[email protected]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