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가 걷던 그길…英 브리스톨·바스로의 시간여행

-가장 살기좋은 에코도시, 브리스톨
항구·공원 겸비한 하이테크 친환경 도시
영국 드라마 ‘스킨스’ 촬영지로도 유명
열기구·문학제전 등 매월 각종 축제 열려

-온천과 사교의 도시, 바스
냉·온탕 구분된 고대 로마온천 지금도 작동
18세기 건축된 초승달 모양 크레센트·서커스 등
온전한 고대유적이 문학적 상상력의 촉매제로

[브리스톨ㆍ바스(영국)=함영훈 기자] 가을이라 부산역 플랫폼의 오전 5시는 어둑어둑하지만, 부산하다. 이 꼭두새벽에 수트케이스를 끄는 여행복 차림의 승객들이 들뜬 표정으로 인천국제공항 행 KTX에 오른다. 승객 열 명 중 두 명 정도는 외국인이다. 대구를 지나 북으로 질주하면서 물상은 깨어나고 파노라마처럼 한반도 내륙의 아침풍경이 KTX 차창에 담긴다. 인천공항에 곧바로 진입한 KTX 승객들은 코레일과 영국항공(BA)의 안내로 발권을 마친 뒤 11시간동안 서쪽으로 날아가 현지시간 오후2시 조금 넘어 런던에 안착했다. 한국발 비행기 시간에 맞춰 기다리던 그레이트 웨스턴 레일(GWR) 기차를 타고 목적지 브리스톨까지 가는데에는 2시간 가량 더 걸린다. KTX-BA-GWR 컬래버는 어느새 브리스톨 초행길인 한국 여행자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놓았다.

잉글랜드 여섯번째 대도시라지만, 브리스톨은 아기자기하다. 거리의 상가 간판부터 마음을 끈다. 옷가게 이름은 ‘포동포동한 얼굴’(Fat Face)이고 생산자와 가게 주인이 독자적인 커피를 합작한 독립카페 이름은 ‘분홍빛 남자’(Pink Man)이다. 이탈리안 카페 이름은 로마제국의 여성편력 철혈제왕인 ‘네로(Nero)‘, 예술미를 가미한 생활용품 가게 이름은 ‘완전한 순수’(Absolute)이다. 귀엽다. 먹을 것, 입을 것을 모두 수작업하고, 집집마다 꽃 장식물이 예쁘다.

▶가장 살기 좋은 도시, 브리스톨= 웃음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영국민의 도시가 귀엽다니, 첫인상부터 반전(反轉)이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이 곳을 새로운 어학연수, 상아탑의 터전으로 삼는 이유는 항구와 공원을 겸비하고, 하이테크 도시이며, 교육도시의 면모가 남다르다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지키는 ‘수제(手製) 철학’과 환경보전 마인드,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시민들의 예능감 속에서 브리스톨의 소프트파워 내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로컬푸드 브랜드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다. 항구옆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보르도키’는 낮엔 자연채광, 밤엔 고효율 전구로 빛을 들이고, 친환경 ‘지속가능한’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브리스톨 중요 행정부서의 이름일 정도로, 이 곳 최고 덕목이다.

도시 사이를 흐르는 에이번강 지류의 민물과 대서양의 바닷물이 좁은 수로들 속에서 어울리는 사이, 대서양의 갈매기가 어느새 도심 한복판까지 날아들고, ‘아우어 바이크 허브(Hour Bike Hub)’라는 시간제 거치대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시민들이 건강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어르신들이 도시 한복판 퀸스퀘어 공원과 도심 수로변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이곳은 영국 최고의 ‘친환경 도시’, ‘가장 살기좋은 도시’로 선정됐다.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브리스톨은 돈벌이가 시원찮았던 의사 걸리버가 소인국ㆍ대인국의 모험을 예견하지 못한 채 자유로운 영혼만을 품고 미지의 남양(南洋)을 향해 출발 곳으로 묘사돼 있다.

‘키치(Kitsch)’에 가까운, 기발한 상상력의 걸리버 스토리 때문일까. 브리스톨은 드라마, 영화의 단골촬영지, 문화의 고향이다. 그래피티의 거장, 뱅크시의 작품이 거리의 벽 곳곳에 남아있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영국드라마 ‘스킨스’의 촬영지이다. ‘스킨스’의 배경인 ‘클리프턴 서스펜션 브리지’는 80m 높이 절벽과 협곡으로 끊긴 클리프턴과 레이우즈를 연결하는 414m 현수교인데, 지금도 멀쩡하다. 1831년 착공당시 세계 유래없는 뉴 테크놀러지였다.

8월엔 국제 열기구 축제를, 9월엔 단편영화 & 애니메이션 축제, 맥주 페스티벌을 연데 이어, 10월엔 문학 제전, 칵테일축제, ‘와일드(자연생태) 스크린 페스티벌’(격년제)이 열린다. 11~1월엔 아프리카 필름 축제, 어쿠스틱 뮤직 페스티벌, 슬랩스틱 코메디 경연대회가 이어지는 등 브리스톨에는 문화예술이 넘친다.

▶고대~근세로의 시간여행, 바스= 브리스톨을 뒤로한 채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30분 가량 가면 온천도시 바스를 만난다. ‘목욕’(Bath)을 뜻하는 영어단어의 유래지이다. 런던-바스는 서울-대전 거리쯤 되겠다.

바스의 최대 매력은 온천탕이라기 보다는 고대~근세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점이다. 온 도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거리엔 오래된 돌, 빛바랜 굴뚝, 고풍스런 성과 교회들로 가득차 있다. 냉-온탕이 구분된 고대의 로만 바스 시스템은 지금도 작동된다. 한센병을 앓던 켈트족 왕자가 바스 온천에 뛰어들어 완쾌된 뒤 왕위 계승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계기로 2000년 전 온천시설이 만들어지고, 그후 수백년간 귀족ㆍ상인 휴양지겸 사교장으로 이용됐지만 로마인이 물러간 뒤 한동안 잊혀졌다.

바스는 18세기초 부활한다. 앤 여왕이 신병 치료차 다녀가면서 영국 최고의 도시설계자, 후원자, 마케터가 도시 재건에 나선 것이다. 설계는 존 우드 1세, 건설에 필요한 재료와 인부 조달은 랠프 앨런, 귀족과 상인들에 대한 마케팅은 리처드 보 내쉬가 맡았다.

그들이 만든 도시가 현재 모습이다. 로마의 콜롯세움에서 영감을 얻어 18세기에 지은 초승달 모양의 크레센트(Crescent)와 서커스(Circus) 건물엔 지금도 사람이 산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본 따 에이번 강에 건설한 풀터니 브리지 일대에선 영화 ‘레미제라블’이 만들어졌다.

통치자의 휴양시설이 있었고, 정치ㆍ경제 오피니언리더들의 사교장이자 웰빙의 장소였던 만큼, 문화예술인도 몰렸다.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과 소설가 찰스 디킨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바스에서 상상력을 키웠고, 이는 바스를 문화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촉매제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철도-항공-철도로 이어지던 코스의 역순이다. 인천행에 앞서 이른 아침 지하철로 런던 웨스트민스트 거리를 찾았다. 교통신호에 따라 자전거와 자동차 행렬이 질서있게 교차한다. 테임즈강 주변 옛 유적ㆍ현대 건축물ㆍ대관람차의 조화가 그럴 듯 하다. 지킬 것은 지키고, 가꿀 것은 가꾸는 영국식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참뜻이 어렴풋하게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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