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者의 대부 “정권퇴진→다당제 연정” 외치다

“다양한 ‘촛불 민심’ 오롯이 담아내려면 집단적 리더십 필요”
前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출신 인명진 경실련 공동대표의 ‘나라를 위한’ 고언

빈자(貧者)에 대한 애정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정으로 만 70년의 생을 채워온 노(老) 신사는 울다가, 웃다가 했다. 일제강점기 끝자락에 태어나 6ㆍ25 전쟁, 4ㆍ19 혁명, 6월 항쟁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눈물은 다 말라버렸을 터였다.

‘순실의 시대’, 민주공화국의 주인을 자임하며 광장에 나온 촛불들이 새삼 그의 눈을 시리게 했다. 그래서 인명진 갈릴리교회 원로목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ㆍ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숭실대학교 숭실평화통일연구원 석좌교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정권퇴진과 권력구조 개편을 외쳤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인명진 목사. 그는 지금의 국정 상황에 대해 땅을 치며 후회했다. 87년 6ㆍ29 선언 당시에 더 확고하게 정의의 가치를 세우고, 시민 중심의 사회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그래도 촛불민심에서 희망을 본다. “자기만 먹고살려고 귀를 막고 스펙만 쌓는 줄 알았던 젊은이들이 거기 있더라. ‘너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기를’. 어느 학생이 든 팻말을 보고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정의와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내일의 기둥을 세우려면 젊은이들의 ‘거룩한 분노’를 현실의 성공으로 이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새록새록하다. 그가 다시 힘을 내 정권퇴진과 권력구조 개편을 외치는이유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정의와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내일의 기둥을 세우려면 젊은이들의 ‘거룩한 분노’를 현실의 성공으로 이어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청년들아, 너희는 잘못이 없다”는 다독임도 잊지 않았다.

노동현장서 예수의 길 따라간 목회자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노동운동과 민주화의 대부(代父)가 되다=인 목사는 어렸을 적부터 성직자를 꿈꿨다. 고민 없이 신학교(한신대학교)에 들어갔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다. ‘예수가 무엇이냐’.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고민이 시작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별다른 것이 없더라.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살았다.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돕고, 위로해주고”. 교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70년대, 가장 핍박받던 노동자의 곁에 가기로 했다. 1971년 졸업과 함께 세탁비누를 만드는 ‘무궁화유지’ 공장에 들어가 2년간 일했다. 근로기준법은 껍데기뿐이었다. 노동자들은 착취와 구타를 일상처럼 받아들였다. 교단 산하 노동자 인권 지원기관인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 곧바로 들어가 13년을 보냈다.

“광릉에서 크낙새가 죽으면 신문에 나도, 노동자들이 연탄가스에 떼죽음을 당하면 안 나더라. 나라에 ‘조권(鳥權)’은 있어도 인권은 없었다. ‘당신도 인간이다. 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있다. 천사처럼 일해 세상 가장 깨끗한 돈을 버니, 노동자임을 부끄러워 말라’고 매일 일깨웠다”. 인간에게 인간의 권리를 알렸을 뿐인데, 독재 정부는 ‘인명진 때문에 시끄럽다’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용공 좌경’이라는 죄목이었다. 그런 것은 몰랐다.

인간에게 인간의 권리 알리다 감옥까지…

“사회주의 책은 읽어 본 적도 없다. 사람 사는 세상 만들자는데 그러더라”. 무수한 탄압과 협박을 견뎠다. 감옥도 갔다 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쌓이고 쌓인 1987년, 그래서 재야(在野) 지도자들의 눈은 인 목사에게 쏠렸다. 정치권, 종교계, 학생, 농민, 노동자가 모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에서 ‘대변인을 맡아달라’고 했다.

“전두환이 4ㆍ13 호헌조치로 민주화 요구를 거부한 때였다. 힘을 모아 군부 독재를 쓰러트리자더라. 주변에서는 감옥행(行) 1순위 자리라고 가지 말라 말리는데, 내가 도리 있나. 가장 낮은 곳에 가야 직성이 풀리는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 시대가 열렸지만, 그는 조용히 교회로 돌아갔다. 1993년 문민정부(김영삼 정권)가 들어섰을 때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노동법도 수정했다. 국민권익위원회의 ‘옴부즈만 제도’도 그가 도입했다. 5년 무사고 운전자에게 발급되는 녹색면허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장관도 안 하고, 국회의원도 안 했다.

“그런 자리를 왜 받나. 밥 못 먹는 애들 밥 먹이고, 나무도 심고 할 일 많은데”. 이후 한때 “부패하기 그지없는 보수정당의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그의 자리는 언제나 다시 허름한 교회였다.


스펙만 쌓는줄 알았던 젊은층 촛불에 ‘눈물’

▶‘가치관을 세우는데 전념하던 목사’다시 세상에 분노하다, “박근혜는 헌법 71조에 의거해 물러나고, 새누리당 이정현 지도부는 당장 사퇴하라. 그것이 나라를 구하는 일”=하지만 인 목사에게는 최근 다시 분노가 찾아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최순실 게이트’가 불티였다. 민주화와 보수개혁 이후, ‘세상으로의 외출’을 자제하던 그였다. 교회에서, 시민단체에서 묵묵히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고, 아픈 사람에게 약주고 살아왔다. 사회에 ‘가치관’을 세우는 데도 전력을 쏟았다.

“예전에는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할 단체가, 민주주의를 지켜줄 제도가 전혀 없었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노동조합이 활성화됐는데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 남과 같이 살려는 게 아니라, 나만 이기려는 가치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만 해도 바빴다. 정치는 삶에서 멀었다.

그때 광장을 채운 촛불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만 먹고살려고 귀를 막고 스펙만 쌓는 줄 알았던 젊은이들이 거기 있더라. ‘너희가 사는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기를’. 어느 학생이 든 팻말을 보고 눈물이 나왔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에 바친 인생의 결과가 ‘헬조선’이던가 한탄스러웠는데,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꺼내기 시작한 ‘거룩한 분노’를 어떻게든 새로운 체제로 연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개헌론자’다. 100만이 모인 촛불 현장에서도 들여다보면 분노의 이유는 달랐다. 그곳에는 공정한 경쟁과 정당한 성과를 원하는 학생과 직장인도 있었고,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토록 다원화된 열망을 오롯이 담아내려면 ‘집단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의당도, 민주당도 모두가 지지율에 비례해 내각에 참여하는 형태다. 물론 전제조건은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이정현 지도부의 퇴진이다.

“거국중립내각이 현실화되려면 박 대통령이 탈당을 하고, 헌법 71조에 의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에게 모두 넘겨야 한다. 선언적 차원의 2선 퇴진이 아니라 아예 모든 권한을 넘기라는 이야기다. 법적으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박 대통령은 사실상 지금 ‘사고’ 상태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속에서 궐위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 개헌 서둘러야”

새누리당 차원에서는 이정현 지도부의 사퇴를 촉구했다. “협치를 위해서는 현재 권력의 중심이 된 국회, 즉 여야가 총리를 추천해야 하는데 이정현 지도부 탓에 정국이 꽉 막혀 있다. 누가 그를 신뢰하겠나. 어서 당을 혁신해 새 지도부가 총리 협상의 파트너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장은 간결하고, 확고했다. ‘최순실의 그림자’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국정을 수습하기 위한 고언이다. 이후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게 될 총리에게는 신속한 개헌을 주문했다.

“내년 초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완성하고, ‘7공화국(새 정부)’이 출범하면 뒤로 물러나 있던 박 대통령은 자연히 임기를 마치는 시나리오”다.

내각의 운영 형태도 이미 구상을 마쳤다.

“예를 들면 노동부 장관은 최소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의당이, 환경부 장관은 환경당이, 경제부총리는 보수파의 최고 경제전문가가 맡는 식의 ‘다당제 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났나 고민하고 고민하다보니, 다 우리 잘못이더라. 6ㆍ29 선언을 할 때부터 정의의 가치를 세우고, 시민 중심의 사회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제대로 된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울다가, 웃다가 하던 인 목사가 안광(眼光)을 빛내며 한 마지막 말이다.

이슬기ㆍ장필수 기자/yesye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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