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감성멜로 시나리오, 운명처럼 다가왔다”

영화 ‘싱글라이더’ 기러기아빠 강재훈 역
미래 위해 현재 포기하고 사는 삶이야기
대사 거의 없이, 절제된 감성연기 열연
“대본만 좋다면 드라마도 도전하고 싶다”

이병헌이 오랜만에 감성멜로 영화에 출연했다. 22일 개봉한 ‘싱글라이더’에서 40대 증권회사 지점장 강재훈 역을 맡았다.

완벽한 가장이었던 그는 부실채권 사건으로 모든 걸 다 잃고 가족이 있는 호주로 떠나지만 다른 삶을 준비하는 아내 수진(공효진)의 모습을 보고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관찰자라로만 머문다.

이병헌에게 감성멜로 출연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내부자들’ ‘마스터’ 등 멜로와는 상관없는 선굵은 작품에만 출연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에 출연했던 것에 대해 이병헌은 “한국에서는 액션 범죄 장르가 오래 유행해 이것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면서 “나는 싫어하는 장르는 없다. 이번 시나리오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제 인생에서 마음을 움직인 몇안되는 시나리오였다. 관객들도 다양한 감성영화를 즐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관객에게 뒤통수를 치거나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깨달음을 주는 영화는 많지만 ‘싱글라이더’는 정서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도 있다. 유부남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하고난 뒤, 멜로 영화에 출연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생각보다 멜로가 강했던 무협영화 ‘협녀, 칼의 기억’에서 이병헌과 전도연 간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가 몰입이 안된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어쨌든 이병헌이 감성이 가장 중요한 영화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것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문제와도 결부돼 있다.

‘싱글라이더’에서 대사는 거의 없지만, 이병헌의 절제된 감성연기는 충분히 칭찬할만하다. 그는 장르형 영화와 멜로 영화를 두루 소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다.

이병헌 기사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은 “적어도 연기로는 깔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새 한국 영화계가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비결이 궁금했다.

“특별한 비결은 없는데. 연기는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내 역할 중심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소설을 읽듯이 한 발 떨어져 읽다보면 인물들이 한명씩 보인다. ‘마스터’ 시나리오를 읽을 때 진 회장에 빠져 보면 객관성을 놓치고, 글쓴이의 의도도 놓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인물에 대해 형상화하다 보면,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감이 잡힌다. 안 잡히는 부분은 내 머리로 상상하고 추론한다.”

‘싱글라이더’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고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기러기 아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많은 기러기 가족이 있음을 감안하면 영화를 보고 기러기 가족의 문제점에 대해 토론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재훈의 선택이 몰고온 결과라고 볼 수도 있고, 재훈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 는 등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이번 영화 때문은 아니지만, 기러기족은 안하고 싶다. 미래의 목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지만, 내가 아이와 함께 못하는 것, 이런 행복감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런 모험을 해야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러기 아빠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이병헌은 “보이지 않는 인생의 목표를 정해놓고, 주변의 행복을 잠깐 미룬 채 앞만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뭘 놓쳤는지를 알게 해준다”면서 “그런데 정작 나는 당시 사막에서 ‘매그니피센트7’를 촬영하고, 가족을 못보고 ‘마스터’ 찍으러 필리핀을 갔다. 이 상황의 아이러니란…”이라고 말했다.

이병헌은 아내가 있는 호주에 가서, 아내의 새로운 생활을 보고도 아내를 계속 관찰하기만 한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거의 없다. 이병헌은 “이렇게 걸어다니고, 저렇게 관찰하다 보면 끝이다. 너무 할 게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표정과 몸짓으로 전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알게됐다. 그런 작업도 재미있었다”고 했다.

이병헌은 “어떤 사람들은 아내에게 난리를 치거나, 멱살을 잡거나, 추궁하지 않겠냐고 얘기하는데,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나는 시나리오를 읽고 재훈의 심리상태가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감정이 극에 달하다보면 화가 나는 그런 것과는 오히려 반대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모든 걸 놔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병헌이 가끔 구사하는 영어 대사도 적절하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말한다. “일상적으로 대학을 나온 한국 직장 남자 정도의 영어다. 한국인의 영어 액센트가 섞여있다. 저도 한국인이라 필리핀 영어(‘마스터’)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전했다. 이어 “응급실에서 아들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만지고 말을 거는데, 그때 아이가 없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나왔다. 자식을 기르는 경험에서 나온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고 했다.

이병헌은 함께 연기한 공효진에 대해 “긴장하는 법이 없다. 힘이 안들어가고 날 것 같은 연기다. 평소 성격도 쿨하고 세련됐고 매력적이다”고 했고 안소희(지나 역)에 대해서는 “평소에는 말이 없지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누구보다 말이 많다. 자신을 깨기 시작하면 가능성과 폭발력이 생길텐데 감춰두고 있는 느낌이다”고 했다.

이병헌은 앞으로도 영화를 열심히 하겠지만, 드라마도 안해본 장르가 아니라 거부감이 없다며, 빠질 수 있는 대본이면 하고싶다고 말했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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