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한의 리썰웨펀] 시조 인용한 한민구, 말장난할 때 아니다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지난 3일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에서 옛 시조를 인용한 사실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한 장관은 취재진 앞에서 “한국말에 이런 게 있잖느냐”라며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까 하노라”고 읊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가인(歌人) 김천택이 고려 말엽부터 편찬 당시까지 널리 알려진 시조를 엮은 고시조집 청구영언에 나오는 작자 미상의 시조 일부 구절이다.

이 시조 전체는 “말하기 좋다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남의 말 내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말로서 말 많으니 말 모름이 좋아라(또는 말 말을까 하노라)”로 이뤄진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5일 오전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6차 아시아안보회의 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한 장관은 이 중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 시조가 실린 청구영언은 조선 영조 4년(1728년) 편찬된 것으로, 해동가요(영조 39년, 1763년)와 가곡원류(고종 13년, 1876년) 등 조선 3대 시조집 중 가장 오래된 시조집이다.

이 시조집은 작자가 분명한 지명씨(知名氏)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이어 작자 미상의 실명씨(失名氏) 작품을 수록하는 형식을 띈다. 한 장관이 인용한 시조는 실명씨 작품 수록편에 나온다.

사드 4기가 추가 반입된 것을 한 장관이 문재인 대통령께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지자 한 장관이 직접 이에 대한 심경을 이런 식으로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한 장관은 “조사가 되고 나름 정리되고 하는데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 한 장관이 말장난 식으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 다수 국민들은 한민구 장관의 부적절한 처사와 행동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국방부 장관이 사드 국내 반입과 같은 주요 사안에 대해 대통령께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은 심각한 국기 문란 및 항명 사태로 비춰진다.

한 장관은 지난 28일 정의용 신임 국가안보실장과의 만남 자리에서 사드 추가 반입과 관련해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틀 뒤인 30일 한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해 물어보자 그제서야 관련 사실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한 장관이 관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체 했을 가능성, 한 장관이 관련 사실을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한 장관이 알고도 모른 체 했다면 국기문란 및 항명의 중죄에 해당된다. 또한 전혀 몰랐다면 장관으로서의 무능함의 극치를 보이며 국가 안보 위기를 자초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한 장관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이미 청와대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만약 항명으로 밝혀지면, 군형법상 전시나 계엄 상황이 아닌 평시에는 3년 이하 징역에 처해진다.

한편, 한 장관이 시조를 인용한 배경에 대해 이미 한 장관이 장관으로서의 권위를 사실상 상실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한 장관은 지난 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샹그릴라 대화에 참석,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사드와 관련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사드 국내 조기 배치를 결정한 당사자로 지목되는 한 장관이 ‘미국과의 사드 재협상’을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까지 맡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 장관이 지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목된다.

한 장관은 회담에서 미 장관에게 “한국 내에서 지금 사드 관련 논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며 운을 뗀 뒤 “사드 관련 한국 정부의 조치는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라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한국 정부가 사드와 관련해 기존 결정을 바꾸거나 미국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 장관 측은 취재진에게 “다 청와대와 조율한 내용”이라며 “(청와대와 조율한) 문안을 충실히 얘기했다”고 설명했다.

또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보고 누락이나 환경영향평가 등을 적시하진 않았고 다른 해석이나 덧붙임이 있는 얘기는 안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와 조율된 문안만 기계적으로 전달했을 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한 장관이 사드 반입 미보고 건으로 사실상 청와대의 신임을 잃어 국제 회담에서 자유롭게 발언할 수 없는 위치에 처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한 장관은 이미 사드 관련 보고 누락 당사자로서 청와대 조사까지 받은 상태로, 귀국 후 조사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31일 ‘한민구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의 국기문란을 엄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단체는 “군 수뇌부가 정권교체기의 권력 공백을 틈타 국군 최고통수권자 몰래 국방 안보를 농단해왔다”라며 “이는 명백한 항명이자 민주적 과정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무시하는 처사로 헌법이 정한 군 통수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국기 문란행위”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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