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판사대표회의…막 오른 사법개혁]‘제왕적’대법원장 인사권 축소가 쟁점

고등부장·법원장 인사 좌지우지
피라미드 인사가 관료화 부추겨
판사대표자회의 상설화도 관건

법원조직법상 법관은 판사, 대법관, 대법원장으로 나뉜다. 승진 개념은 없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 법관의 업무 특성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다. 부장판사 등은 보직일 뿐 승진 개념이 아니다. 법원 정기인사에서 직책 관계 없이 모두 ‘전보 인사’로 표기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임관 직후 부장판사를 보조하는 역할의 ‘배석판사’로 시작해, 홀로 재판을 맡는 ‘단독 판사’가 되고, 다른 배석판사와 함께 재판의 주심 역할을 하는 ‘부장판사’로 오른다. 이후 극소수만이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발탁돼 사실상 법원장과 대법관이 될 자격을 얻는다.

한 기수에 선택받은 1~2명 정도만 대법관이 되는 이러한 피라미드식 인사 구조는 판사들이 승진을 위해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 진다. 2000여 명의 판사를 어디에 배치하고 누구를 고등부장으로, 법원장으로, 대법관으로 발탁할 지는 고스란히 인사책임자인 대법원장의 의중에 달려있다. 대법원장이 법원에서 ‘제왕적 권력’으로 통하는 건 이 때문이다.

19일 오전 10시 전국 2000여명의 판사를 대표한 판사 100명이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참가했다. 8년만에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로 사법개혁의 중요한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판사대표회의 상설화’ 사법개혁 첫단추?=19일 전국의 판사 대표자 100명이 한자리에 모여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일선 재판부의 독립성을 확보할지를 논의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이 자리에서 논의한 내용은 ‘상향식 사법개혁’의 단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법원별로 선출된 대표자들은 이날 △대법원이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에 대한 조사의 적절성 △조사 결과에 따른 책임소재 규명 △사법행정권 남용 재발 방지 방안 △법관대표회의 상설화 등 4가지 의제를 의논한다.

일단 판사회의를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상설화할 것인지 논의한다. 판사회의가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상대는 대법원장일 수밖에 없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임기가 9월이면 끝나 새 대법원장에게 판사들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선 일회성으로 끝내선 안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대법원장 권한을 축소하는 문제는 대법관 임명제청권처럼 헌법을 고쳐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간단히 법원 내부 규칙을 개정하면 해결되는 문제도 있다.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에 관한 것이 대표적이다. 법원 규칙은 대법관회의에서 만들거나 고칠 수 있기 때문에 대표회의 입장에선 다음 대법원장을 상대로 제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확인받는 게 중요하다.

회의에 참석하는 한 판사는 “현재 운영되는 판사회의는 법원장의 자문기구에 불과하다”며 “판사회의를 상설화할 지, 그렇게 한다면 의결 범위는 어디까지로 정할지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야 하는데, 입법과 대법원 규칙 개정 어느쪽이 맞는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고등부장 승진 폐지에 대한 논란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당초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 문제는 별도의 의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판사대표회의 직전 일선 재판부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이 문제가 논의돼야 하는 의견이 많아 추가 안건으로 삼았다.

‘판사 블랙리스트’ 문제 재논의 가능성= 대법원이 법원 내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활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은 이번 회의가 열리는 계기가 됐다.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사법행정권이 남용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특정 성향의 판사들을 따로 관리한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없었다고 결론냈다.

하지만 해당 목록을 저장한 것으로 알려진 컴퓨터 등 물적 자료에 대한 조사 없이 당사자의 진술만으로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에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법원행정처와 일선 판사 간 시각 차도 크다.

법원행정처에 근무했던 한 부장판사는 “명단이 존재한다고 해도, 실제 인사상 불이익으로 이어졌다는 게 밝혀져야 하지 않겠냐”며 “단순히 몇몇 인사에 대한 성향을 기재한 리스트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문제가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판사는 “명단이 있다면, 작성됐다는 그 자체로 잘못됐다, 청와대가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특정 인사를 관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판사회의가 이 문제에 관해 추가 진상조사를 벌이는 것으로 의결한다면 양 대법원장과 판사회의 간 대립구도가 고착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고양=좌영길 기자/jyg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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