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수능, 그리고 지진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문명(civilization)은 인간의 지혜로 자연 제약을 극복하고 무리를 이뤄 살아낸 선대 삶의 자취다.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 발전까지 모두 문명의 구성요소다. 문명적 요소는 광범위한데 그 중 하나만 짚어내면 이런 것이다.

요샌 어느 주차장에나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엔 장애인 주차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는 소수가 겪는 압도적 불편이 다수가 겪는 소소한 불편보다 더 무겁게 사회가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애인 주차 공간은 차량 두대가 들어갈만큼 넓게 공간이 배정돼 있다. 일반인이 세울 경우 과태료가 매겨진다. 일견 낭비되는 공간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을 장애인들을 위해 비워두기로 약속했다. 장애인들이 겪을 압도적 불편함에 대한 배려다. 이것은 문명의 일단이다. 수천년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문명이 지향했던 방향이었다.

2017년 11월 15일 밤 8시. 한국은 자국이 문명국임을 입증했다. 수능 연기 발표가 방송을 탔다. 전격적이었다. 15일 오후 포항에서 발생한 진도 5.4의 지진 때문에 포항 지역 수험생들이 다음날 무너질지 모르는 교사(敎舍)에서 시험을 치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대비책을 마련한 다음 1주일 후인 23일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국민의 안전은 국가의 존재 이유다. 수능 연기가 필요할만큼 피해가 심각한지를 확인키 위해 장관이 직접 포항으로 내려가 상황을 살폈다. 이대로는 포항 학생들의 안전이 위험할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아시아 순방 후 비행기 안에서 지진 소식을 접한 대통령은 최종 수능연기를 지시했고, 대통령의 지시는 곧 이와 관련해 따를 수 있는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국가는 빨랐다. 현장 파악은 신속했고, 발표는 전격적이었으며, 철학은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간직했다.

지난 23일 수능이 무사히 끝났다. 여진 우려는 다행히 우려에 그쳤다. 올해 수능을 치른 수험생은 전국적으로 59만명이다. 포항지역 수험생은 5600명 가량이다. 수능 연기는 전체의 1%도 안되는 이들이 겪을 압도적 불편, 또는 1%도 안되는 이들이 생명과 안전의 위험 속에 대입 시험을 치러야 하는 위험함을 국가가 나서서 막았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수천년간 우리가 지향하고 또 그려왔던 문명의 방향성과 일치한다.

수능이 끝난 다음날인 지난 24일 대통령은 포항여고를 찾았다. 깜짝 방문이었다. 대통령은 교실이 무너졌던 포항여고 3학년 9반을 찾았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진 소식을 들었다며 가장 큰 걱정이 수능이었다고 했다. 기회가 불공정하게 주어져선 안되고 피해를 입지 않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수능 연기를 지지해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했다. 정부의 전격적인 수능 연기 발표는 성숙한 국민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인구는 5200만명이다. 이 가운데엔 조단위 부자부터 당장 오늘 저녁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인류가 무리를 이루고 자연 제약을 극복하며 75억 세계 인류사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문명이 지향했던 인류애와 약자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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