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내란죄” 주장한 심재철, 알고보니 ‘서울역 회군’ 주역

-심재철 “적폐청산, 내란죄 주장”에 민주당 “표현가능한 모든 언어로 규탄”
-1980년 서울의봄, 심재철과 유시민의 ‘서울역 회군’ 토론 재조명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국회 부의장인 심재철 의원(자유한국당, 경기 안양 동안구을)이 지난 28일 문재인 대통령을 내란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더불어민주당 측은 “표현 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 규탄한다”며 강력 반발했다.

박완주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28일 관련 브리핑에서 “심 의원의 주장이 황당무계하다”며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법치주의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국정농단 사태를 야기한 자유한국당 출신 국회 부의장의 금도를 넘은 주장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심재철 [사진=온라인커뮤니티]

이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탄생한 정부를, 쿠테타와 폭압으로 정권을 찬탈했던 신군부와 비교하다니 그 무지하고 천박한 역사인식에 더불어민주당은 표현가능한 모든 언어를 동원해 규탄한다”고 전했다.

박 수석대변인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국민의 명령에 저항하는 적폐 세력의 온갖 꼼수에 동조할 국민은 없다”며 심 의원의 부의장직 사퇴와 자유한국당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심 부의장은 즉각 국민 앞에 사과하고 부의장직에서 사퇴해야 하며, 법적 정치적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라며 “심 부의장의 망언에 대해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한국당은 명확히 입장을 밝히고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앞서 심재철 의원은 이날 국회 정론관 브리핑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이라는 미명으로 여러 행정부처에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해 벌이고 있는 일은 적법절차를 명백하게 위배한 잘못된 행위”라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문재인 정부는 불법적으로 국민 혈세를 사용하며 점령군처럼 국가기밀을 마구 뒤지는 모든 과거사위원회를 즉각 해체해야 한다”며 “검찰은 과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들어 수행하고 있는 불법수사를 즉각 중단하고, 법원은 검찰이 수사, 구속한 모든 피의자를 즉각 석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과 임종석 비서실장, 서훈 국정원장과 윤석열 서울 중앙지검장을 법치파괴의 내란죄와 국가기밀누설죄 등으로 형사고발 해야 한다”며 한국당 차원의 법률대응기구 출범 등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했다.

▶심재철 “내란죄 주장”에 민주당 “표현가능한 모든 언어로 규탄”=자유한국당에 뿌리를 내려 현재 5선 중진의원으로 20대 국회 부의장에 오른 심재철 의원은 1958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출생, 광주제일고를 나온 호남 토박이다.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에 입학,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대학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서울의 봄’이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민주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1979년 10월26일~1980년 5월17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1980년 5월17일은 전두환 육군 보안사령관 중심의 신군부가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시점이다.

심재철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신군부의 쿠데타 이틀 전인 1980년 5월15일 서울역 앞에 전국 대학생 10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회군’, 즉 철수 결정을 내린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당시 10만 대학생들의 서울역 철수가 신군부에 반격의 여지를 줬고, 결국 전두환 사령관 중심의 신군부 쿠데타로 이어져 대한민국 현대사가 바뀌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5월17일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다음날 신군부에 대한 저항 의지가 강했던 광주에서 5.18의 참상을 일으킨다.

서울역 앞에 10만 대학생이 운집한 1980년 5월15일 학생 시위를 주도하던 서울대 총학생회 지도부 내에서는 온건파 심재철과 강경파 유시민의 입장이 대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면은 지난 2005년 방송된 MBC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묘사됐다.

드라마 속 장면에서 중국집에 모여앉은 4명의 대학생은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해 토론한다

당시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그동안 박정희에게 속아온 국민들에게 군부독재정권의 실체를 알려야 해. 하지만 기습시위를 하는 것만으로는 총칼과 탱크로 무장한 전두환 같은 사람을 막기는 역부족이야”라고 말한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시민이 말대로 우리가 가진 건 피 끓는 열정과 주먹뿐이야. 유신이 만들어 놓은 학도 호국단을 폐지하고 학생회를 부활시켜 신세력의 재집권을 막아야 해”라고 주장한다.

경북 경주 출신인 유시민은 대구 심인고 졸업 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1980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5월15일 당시 18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할 것인가, 철수할 것인가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당시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 등과 함께 유시민도 철수를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재철 [사진제공=연합뉴스]

▶심재철과 유시민의 ‘서울역 회군’ 토론 재조명=하지만 당시 대학총학생회장단 대표였던 심재철 총학생회장의 철수 주장에 힘이 실려 철수가 결정됐다고 한다. 심재철은 교육부 장관과 만나 학생들의 안전 귀가를 약속받고, 학생들에게 서울역 철수 결정을 알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유시민은 당시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은 자살행위”라며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10만 학생들이 철수한 지 이틀 뒤인 5월 17일 실권을 잡은 신군부는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운동 대표들을 대량 연행했고, 다음날인 18일 광주를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역사의 물결이 흘렀다.

한편, 심재철 의원은 지난해 12월 ‘서울역 회군의 역사적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경북매일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1월30일 게재된 이병철 시인 칼럼에서 ‘1980년 5월 수십만 대학생들은 원래 청와대까지 행진하기로 했으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난센스로 인해 서울역에서 해산하고 만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사흘 뒤 광주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썼다. 이 시인의 말은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며 적극 반박했다.

이 글에서 심 의원은 “이 시인은 ‘온건파 심재철과 강경파 유시민의 입장이 엇갈렸다’고 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먼저 유시민은 서울역 광장 앞 마이크로 버스에 모여 해산 결정을 내렸던 서울지역 학생회장단의 멤버가 아니어서 회장단 결정 과정에 관여할 수 없었다. 유시민은 자신이 쓴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유시민이 청와대 진격을 주장했고 심재철은 이를 반대했다는 주장은 2008년 쇠고기 광우병시위 때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된 후 시위 때마다 강경 시위꾼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 유포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유시민의 표현을 한 번 더 빌면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라는 것이 당시 학생지도부의 고민이었다”며 “80년 5월의 상황은 요즘과 달리 시민단체의 조직화는 전혀 없는 상태여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학생만의 것일 뿐 시민들의 동참은 없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의 동참이 없이 유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상황도 서울역 해산의 한 요인이었다”고 해명했다.

심 의원은 또 “당시 서울역광장 시위가 ‘원래 청와대까지 행진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말이다. 청와대 행진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었다. 시위 현장에서 일부가 ‘청와대로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이는 소수 의견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당일 10만여 학생 시위대가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그 자체가 사전에 전혀 계획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신군부에게 빌미를 줄 수 있으므로 당분간 가두시위를 자제하며 시민들에게 충분한 홍보를 해서 역량을 키우며 준비하자고 며칠 전 서울지역 학생회장단이 결정했음에도 5월 13일 연세대에서 가두로 뛰쳐나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어 터져 나온 일종의 돌발상황이었다”며 돌아봤다.

그는 “당시 경찰은 남대문 일대를 저지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두로 진출한 시위대들이 자연스레 서울역 광장에 모이게 됐다. 만일 조직적으로 서울역에 모이자고 했다면 각 대학의 역할과 동원 인원, 연락망, 확성기 등의 준비도 없이 모였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심 의원은 “당시 서울역 광장에 모인 대학생들이 해산한 것은 서울지역 1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의 결정사항이었다. 준비 없이 가두로 뛰쳐나온 시위대에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5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서울역 앞 버스 안에 모여 치열하게 해산여부를 토론했고, 당시 서울대 학생처장인 이수성 교수의 중재로 문교부장관에게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약속받은 후 해산을 결정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당시 학생 시위대가 서울역에서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시위대가 야간에 군경과 충돌했다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초래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당시 학생 시위지도부는 이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행한 역사를 역사적 가정으로 시위참여 독려에 이용하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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