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러리 아닌 최후의 방패…국선변호사의 세계

-법원, 사선 변호인 못구한 형사사건 피고인에 국선변호인 지정
-2년 주기로 재판 성실성 등 고려해 재위촉
-변론 도중 법원 허가 없이 사임 불가
-한해 12만 건 일폭탄에도…매년 경쟁률 치솟아

[헤럴드경제=고도예 기자] 박근혜(65) 전 대통령의 국선변호인단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형식적인 ‘들러리’에 그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이들은 법정에서 검찰과 팽팽한 공방을 벌였다. 최순실 씨의 태블릿 PC등 핵심 증거의 압수절차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국선변호인은 ‘한직’ ‘들러리’라는 세간의 오해와 진실을 짚어본다.

국선변호인은 실력 없는 들러리? = 국선변호사들은 유독 ‘실력 없는 들러리’라는 오해에 휩싸여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법정에서 ‘선처를 바란다’는 말로 일관했던 앵무새식 변론 탓일 수 있다. 법원이 국선 전담 변호인제를 시행하면서 형식적인 변론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세간의 편견은 여전히 굳어져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국선변호사가 ‘들러리 변론’을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국선변호인은 2년 주기로 법원의 평가를 받아 재위촉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재판이나 피고인 접견을 성실하게 하지 않았다면 재위촉에서 탈락할 수도 있는 구조다. 정기적으로 국선변호인을 교체해 분위기를 쇄신하는 법원도 있다.

사건을 수임하지 못하는 가난한 변호사들이 ‘호구지책’으로 국선변호인에 지원한다는 것도 옛말이 됐다. 과거 방송 ‘솔로몬의 선택’에 출연해 유명세를 얻은 김병준(55) 변호사도 서울중앙지법의 일반 국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국선전담 변호사는 “형사사건 수임 경험을 하고 소위 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국선을 맡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국선변호인은 ‘최후의 방패’ = “변호사를 구하기 어려운 피고인들의 최후의 방패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어요.” 서울중앙지법의 A 국선전담 변호사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헌법에 명시된 ‘누구든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했다.

국선변호인들은 사선 변호인을 구하지 못한 피고인들을 법원 결정에 따라 변론하게 된다. 형사소송법에서는 법원이 구속되거나 미성년자ㆍ70세 이상ㆍ농아자ㆍ심신장애가 의심되는 피고인ㆍ사형 무기 또는 단기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국선변호인을 붙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변호인을 구하지 못했다면 피고인 요청에 따라 국선변호인이 지정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국선변호인들은 소위 ‘기피대상’인 사건을 맡아 변론하는 일도 잦다. 딸의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는 ‘어금니 아빠’ 이영학(35) 씨도 향후 1심 재판에서 국선변호인의 변론을 받게 됐다. 이 씨의 사선 변호인은 지난 1일 법원에 사임계를 냈다.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의 주범 김모(17)양도 항소심에서 국선변호인의 변호를 받고 있다.

변론 도중 어려움을 겪더라도 법원 허가 없이 사임할 수는 없다. A 국선전담 변호사는 “법적으로 맞지 않는 걸 변론해달라고 주장하는 피고인들이 있더라도 쉽게 사임할 수는 없다”며 “당사자들이 특정 변호사를 원해서 선임한게 아니다보니 재판 준비 과정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협조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국선전담 경험이 많은 또다른 변호사도 “피고인들은 국선변호인이 무료로 봉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변론을 충실히 할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재판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피고인이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겠다고 하면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국선변호인은 누구 = 국선변호인은 국선 사건만 맡는 국선전담과 다른 사건도 수임하는 일반 국선으로 나뉜다. 국선전담은 법원 각 재판부에 배정돼 급여를 받는다. 월 600~800만 원의 급여와 50만 원의 사무실 유지비를 지급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기준 전국 37개 법원에 222명의 변호사가 국선전담으로 위촉돼있다.

일반국선은 사건을 맡을 때마다 기본 30만 원 수당을 받는다. 법원은 변호사 단체로부터 일반국선 변호사 명단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기용한다.

피고인은 구속영장심사 단계에서부터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국선변호사는 한직? 한해 12만 건 일폭탄=최근 변호사 업계에서는 “국선이 형사사건을 싹쓸이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국선변호인이 맡는 사건이 매년 늘다보니 사선 변호인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사법연감을 보면 지난해 형사사건 피고인 37만 6767명 가운데 33.5%인 12만 7016명이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았다. 국선변호인이 맡은 사건은 총 12만 1527건으로 9년 전인 2007년(8만 360건)에 비해 50% 이상 늘었다.

쏟아지는 일거리 때문에 국선변호인들에게 야근과 주말근무는 필수가 됐다. 국선전담 경험이 있는 이은숙 변호사는 “많으면 하루 10개 사건을 법정에서 연속으로 변론할 때도 있었다”며 “틈틈이 피고인들과 면담하고 전화연락을 해야 해 서면준비는 주로 늦은 밤이나 주말에 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국선변호사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다. 변호사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국선전담이 각광받는 것이다. 대법원의 지난해 상반기 국선 변호인 모집 경쟁률도 10.3대 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법원으로부터의 독립, 국선변호인 제도의 과제= “피고인들이 저를 변호인이 아닌 법원 직원으로 대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국선전담으로 일했던 B변호사는 이같이 말했다. 그는 피고인을 접견할 때면 “자백을 바라시죠”라는 한숨섞인 질타를 받았다고 했다. 피고인들은 법원과 B변호사를 동일시하는 듯한 발언도 수차례 했다. 그는 “국선변호인은 관리주체인 법원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 “국선변호인의 입장보다는 사건 당사자들이 보기에 법원이 국선변호인을 관리하는 게 적절치 않아보일 수 있다”고 답했다.

국선변호인 관리를 법원이 아닌 제3의 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오는 2019년부터 변호사 수백명이 일하는 ‘변호처’를 설립해 수사단계부터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형사공공변호인 제도를 검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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