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박스’ 고정관념 탈피한 3인 “페미니즘, 여성 전유물 아닙니다”

“사내 자식이 돼서 왜 울어”, “남자는 강해야지”.

남성들이 익숙하게 듣는 말이지만 미국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흑인 작가 토니 포터가 들었다면 ‘맨박스(Man Box)’라 분개했을 말들이다. 토니 포터는 ‘남자니까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남자들을 가두는 상자로 비유하며 남성들 역시 성 역할에 대한 억압에서 탈피해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맨박스 개념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후 성 대결 양상으로 전개된 국내 페미니즘 담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91년생 김영빈 “성 고정관념, 깨부수니 자유로와요”= 김영빈 데블스TV 이사는 SNS를 통해 페미니즘 발언을 하는 몇 안 되는 20대 남성이다. 몇차례 SNS에 올린 페미니즘 발언이 화제가 되면서 여성들 사이에 ‘남성 페미니스트’로 소개됐다. 김 씨가 제작하는 영상 컨텐츠 역시 약자 혐오가 없는 청정 컨텐츠로 꼽힌다.

김영빈

김 씨는 “강남역 살인 사건을 통해 여성들이 겪는 젠더 억압에 눈 떴다. 첫 페미니즘 책으로 ‘맨박스’를 읽고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와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자기 표현을 억제하는 성인 남성 모델을 강요받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하면서 ’감정 표현할 줄 아는 사람, 슬픈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씨는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짓는 사고는 어느 쪽에게도 불행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는 “남성성을 투박함, 여성성을 섬세함으로 구분짓는 성 고정관념 때문에 조금이라도 섬세한 남성들에겐 ‘기지배 같다’는 비난이 따라온다”며 “이는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을 통해 왜곡된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동시에 여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3040 아빠 육아 정우열, “육아와 살림, 엄마라서 잘 하는 게 아니다”=아빠 육아휴직이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고 하지만 두 아이의 주 양육자로 수년간 살아온 정 씨만큼 ‘본격적’으로 뛰어든 경우는 드물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 씨는 ‘남자는 육아와 살림을 할 수 없다’는 맨박스를 탈피한 대표적인 ‘육아빠’(육아 하는 아빠) 케이스다.

김영빈

정 씨는 “아이들이 엄마를 더 좋아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아이들은 ‘주양육자’와 애착관계가 더 두터운 것일 뿐”이라며 아빠가 육아와 살림을 담당하는 정 씨 가정은 두 아이 모두 아빠를 더 따른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서 육아빠로 조명받을 때마다 본인의 ‘특수성’이 부각되는 사례를 경계한다. 정 씨는 “아이를 너무 좋아했거나 특별한 각오나 다짐을 해서 육아를 시작한 게 아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육아하는 게 나은지 비교해 합리적으로 결정한 것 뿐“이라며 “육아도 집안일도 성별 관계 없이 하다보면 잘 하게 된다. 육아나 집안일 잘 하게 태어나는 성별은 없다. 안 해서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적으론 맨박스에서 벗어난 정 씨지만 육아는 당연히 엄마 몫이라고 상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육아빠로 살아가란 여전히 녹록치않다. 그는 “맘카페나 학부모 커뮤니티는 으레 엄마 중심으로 구성돼 아빠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아빠 육아자들은 정보력이 떨어진다는 편견도 있는 것 같다”며 해답을 더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87학번 문화평론가 정덕현, “80년대 운동방식 보단 일상의 게릴라전이 중요”=1987년 사회운동을 지켜본 문화평론가 정덕현 씨는 기성세대에 속하지만 미디어 속 성 차별을 지적하는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정 씨에게 뿌리 깊은 남성중심 사고가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기성세대가 어떻게 바뀔 수 있겠냐고 질문했다. 정 씨는 80년대식 사회운동보단 ‘게릴라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영빈

정 씨는 “87년 이후 사회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성평등 영역에서는 큰 발전이 없었다”며 “그때는 노동 문제처럼 비교적 전선이 명확한 싸움을 했지만 성평등 문제는 전선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 더 어려운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한쪽 성만 변화해선 힘들고 각자 영역에서 싸우는 일상적인 게릴라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화평론가인 그가 미디어 속 성 차별을 드러내려 노력하고 있듯이 각자 영역에서 발생하는 성 차별에 눈 떠야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유진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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