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기획-] 립스틱 던지고 욕설까지…그래도 ‘고객 갑질’ 참아야합니까?

-감정노동자 61%, “폭행ㆍ성희롱 등 ‘甲질’ 경험했다”
-“고객잘못에도 무조건 직원 징계 기업문화 바꿔야”

[헤럴드경제=유오상 기자] 서울의 한 백화점 직원으로 일하는 조규연(28ㆍ여) 씨는 최근 다른 직업을 알아보고 있다. 어렵게 잡은 일자리였지만, 도저히 일을 계속 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문제는 지난달 손님과 마찰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화장품을 담당하던 조 씨에게 한 손님이 진열 중인 립스틱 색을 문제 삼았다. 조 씨는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하려 했지만, 손님은 “말이 건방지다”며 립스틱을 조 씨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손님에게 맞은 것도 억울한데, 조 씨는 매니저 앞에서 손님에게 고개 숙여 사과까지 해야 했다. 망가진 립스틱 값은 조 씨의 월급에서 빠져나갔다. 일이 끝나고 매니저가 조 씨를 위로했지만, 이미 상한 조 씨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는 분노와 함께 고객이 망가뜨린 제품값도 내가 내야하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고 호소했다.

[사진=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지난 2015년 조사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답한 감정노동자의 61%가 지난 1년 동안 고객으로부터 폭언과 폭행, 성희롱 등을 당했다고 답했다. 열악한 감정노동 실태에 여성 종사자의 60%, 남성 종사자의 28%는 아예 감정 장애를 겪을 수 있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감정노동자 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지만, 현실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손님은 왕’이라는 허울좋은 친절강요 문화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갑(甲)질’을 하는 고객과, 고객을 잃을까 하는 우려에 직원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업주 사이에서 감정노동자들만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감정노동자는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회사에서 원하는 감정을 유지해야 하는 서비스분야 노동자들을 통칭한다. 보통 손님들을 직접 맞대야 하는 콜센터 직원이나 점원 등 판매업종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텔에서 일하는 임정무(32) 씨도 비슷한 경험이 많다. 임 씨는 “관련 학과 4년을 다닐 동안, 내가 그동안 호텔을 이용할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갑질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며 “하루는 “벨보이 이리 와봐”라는 식으로 부른 고객이 화를 내는 걸 30분 동안 웃으며 응대해줘야 했다”고 호소했다. 그는 ”워낙 다양한 고객들을 모두 응대해야 하는데다 회사에서 강조하는 친절과 갑질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나눠진 업무 가이드라인도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감정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갑질은 만연한 상황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답한 감정노동자의 61%가 지난 1년 동안 고객으로부터 폭언과 폭행, 성희롱 등을 당했다고 답했다. 열악한 감정노동 실태에 여성 종사자의 60%, 남성 종사자의 28%는 아예 감정 장애를 겪을 수 있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일 감정노동자들의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해 국회의장에게 감정노동자보호법안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일부 공무원도 감정노동의 굴레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집배원 이모(46) 씨는 ”과중한 업무도 문제지만, 갑질을 하는 민원이 더 무섭다“며 “하루는 평소에는 친절한 이웃이 근무복을 입은 직원에게 반말을 해대는 모습을 보며 자괴감이 들었다”고 호소했다.

이 씨는 “때로는 막말하는 악성 민원인보다 이를 막지 못하는 기관이 더 야속할 때도 있다”며 “욕설은 내가 당했는데, 결국 민원으로 징계를 받고 제대로 된 구제를 못 받아 피해를 보는 건 우리”라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감정노동으로 정신적 고통을 격고 있는 노동자는 10명 중 2명꼴이었지만, 이를 해소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교육이 있는 경우는 전체 중 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도 감정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감정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김대원 노무사 역시 “고객과 마찰이 생긴다고 해서 무조건 징계부터 하고 보는 기업문화를 바꿔야 한다”며 “잘못한 게 없는데도 직원을 무조건 을로 만드는 문화를 바꿔야만 감정노동자의 권익도 향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osy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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