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문제” “배신감 느껴” 법정서 고개 숙인 세 국정원장

-‘朴에 뇌물’ 혐의 전직 국정원장들 첫 공판

[헤럴드경제=고도예 기자] 박근혜(66) 전 대통령에게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억 원을 뇌물로 바친 혐의를 받는 전직 국정원장들이 기소 후 처음으로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재준(74)ㆍ이병기(71)ㆍ이병호(78) 전 국정원장은 1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 성창호) 심리로 열린 첫 재판에 나란히 출석했다. 특활비 전달 과정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헌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과 이원종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함께 재판을 받았다.

구속수감된 이병기 전 원장은 연푸른색 수의 차림으로 법정에 나왔다. 시종일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병기 전 원장은 재판 도중 발언 기회를 얻어 “예산을 사용하는 데 지식이 모자란 책임이 있다면 기꺼이 지겠다”며 “제대로 된 국가운영을 위해 쓰이길 기대했지만 기대와 반대로 돼 배신감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남 전 원장은 이병기 전 원장과는 달리 수의 대신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재판을 지켜봤다. 생년월일과 직업을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또렷한 목소리로 “이 사건 관련해서는 국정원장을 재직했다”고 답했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이병호 전 원장도 법정에서 “다른 사람이 국정원장이 됐다면 그분이 이 법정에 섰으리라 생각한다”며 “오랫동안 계속된 제도들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심경을 밝혔다.

검찰은 세 전직 국정원장이 향후 임기나 인사, 예산 편성과 관련해 정부 혜택을 기대하면서 특활비를 박 전 대통령에게 상납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특활비를 적법한 절차 없이 현금으로 청와대 관계자에게 건넨 만큼 이를 예산 전용이 아닌 뇌물거래로 봐야한다는게 검찰 입장이다. 남 전 원장은 2013년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매달 5000만 원 씩 총 6억 원을, 이병기 전 원장은 2014년 7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매달 1억 원 씩 총 8억 원을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재임 기간이 길었던 이병호 전 원장은 2015년 3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21억 원의 특활비를 청와대에 건넨 혐의를 받는다.

세 전직 국정원장은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청와대에 국정원 특활비를 건넨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뇌물을 바친 것이 아니라 예산 지원 차 돈을 건넨 것이라 유죄가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관행에 따라 상급 기관에 돈을 줬을 뿐 대가를 바라고 뇌물을 바친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남 전 원장 측 변호인은 “국정 상위 기관이자 최고 기관인 청와대 예산으로 사용된다는 생각으로 특활비를 전달한 것이지 상관없는 비용으로 사용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병기 전 원장 측도 “특활비는 애매한 용도로 사용돼왔다”며 “국가를 위해 적절히 사용됐다면 국가 전체 입장에서는 특활비 사용 목적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활비를 청와대에 전달해 국정원 국고에 손해를 끼쳤다는 국고손실 혐의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예산 항목대로 엄격하게 지출하지 않은 건 잘못이지만, 국정원 예산에 손해를 끼치려는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email protected]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