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 갈등, 결투 그리고 질서

서구에서 결투는 오랜 역사를 가진다. 이미 6세기경부터 게르만족들에게는 ‘사법적 결투’라는 풍습이 있었다. 사법적 결투란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 할 경우, 결투를 통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풍습을 말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신은 정의로운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때문에, 결투에 이긴 사람이 옳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사법적 결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중세가 되자 기사들이 탄생하면서 결투의 목적이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수치스런 삶을 살기 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투를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결투는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변해 갔다. 예쁜 아가씨를 사이에 두고 결투를 벌이는 것은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침을 뱉었다고, 욕을 했다고 결투를 벌이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목숨을 건 결투를 벌였다. 이런 바보스런 결투는 19세기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결투의 역사가 나쁜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다. 흔히들 ‘미국의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은 카우보이들이고, 일본의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은 사무라이들이다.’라고 말한다. 서부 개척 시대에 카우보이는 총을 가지고 다녔다. 총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다들 총을 들고 다녔기에 다른 사람의 총에 죽을 수도 있었다.

칼을 들고 다닌 일본의 사무라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섣불리 갈등을 일으킬 수가 없다. 사소한 갈등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는 갈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었다. 사회의 공통된 규칙, 바로 ‘질서’다. 서로가 질서를 지키면, 갈등은 피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강력한 질서의식을 만든 것이다. 과거 후쿠오카 원전 사고 때, 극도로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식료품 가게 앞에서 주민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은 이런 역사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투가 아니라, 유교적인 ‘권위’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었다.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동네에서는 존경받는 어르신의 말씀이 법이었다. 이분들이 옳고 그름을 가르치시고, 갈등을 중재해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어르신들께 질서 유지를 기대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 전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어느 주민이 자신의 차량으로 지하 주차장 입구를 막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관리실에서 주차위반 스티커를 붙인 것이 화근이 되어 생긴 일이라고 한다. 결국 차주가 사과를 하고 일단락되었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갈등을 조정하는 데,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만 한다. 차량 통행을 막아버리면, 결국 곤란해진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 사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태도 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이번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나면, 먼저 내려서 욕설부터 내 뱉는다. 별 것 아닌 일로 사람을 무차별 폭행하는 사건들이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터진다. 조그만 갈등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인터넷에서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몹쓸 사람’으로 매도되어 버리는 일을 우리는 종종 보아 왔다. 모두 자신이 가진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폭력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6세기의 미개한 시대에나 있었던 결투의 모습이다.

무질서는 갈등을 불러온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동반한 질서의식의 역사’도 없고, 과거 질서를 지탱해 주던 ‘유교적 권위’도 이미 무너졌다. 그리고 조그만 갈등에도 힘겨루기를 하는 어리석은 결투의 모습은 점점 잦아진다. 우리 사회는 이대로도 괜찮은 것일까?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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