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폰을 든 ‘펑크룩의 대모’…패션은 메시지다

런웨이의 주인공 양보 않는 디자이너

매년 남성복·여성복 꾸준히 창작

드레스·구두·향수 아우르는 패션제국

사형제·환경파괴 비판 거침없는 발언

“가스개발 반대” 피켓 런웨이에…

패션위크 2019 가을겨울 콜렉션 런웨이 피날레 무대에선 비비안 웨스트우드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 디자이너로서 나의 직업은 내게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할 기회를 준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패션 런웨이에서 디자이너의 등장은 늘 마지막이다. 피날레의 끝에서 마지막 모델의 뒤를 따라 등장하는 디자이너는 관객들의 박수와 함께 짧은 인사만 남긴 채 백스테이지 뒤로 사라진다. 때문에 통상 런웨이의 주인공은 모델들이 입은 콜렉션 옷이지, 디자이너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영국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78)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옷, 그리고 자신의 콜렉션을 선보이기 위한 무대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런웨이에서 마이크를 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낯설지 않을 정도다. 마치 ‘반체제’의 상징 마냥, 펑크 패션의 선구자였던 그는 오늘날 브렉시트, 기후변화, 인권 등 숱한 국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드론 공격 명령을 내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고, 토니 플레어 전 영국 총리를 ‘전쟁 범죄자’라고 부르는 그는 거리낌이 없고, 도발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펑키한가? 그렇다. 그럼 그는 정치적인가. 아마도 그렇다.”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2013년 ‘꿀벌’ 보호운동 현장에서 위니 더 푸(Winnie The Pooh) 복장을 운동원과 함께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와 사랑에 빠지다 =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와 면직 공장에 다니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당초 그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교육대학을 진학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노점에서 보석을 만들어파는 일을 병행했다. 1962년 그는 데릭 웨스트우드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불과 3년 가량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한 남자를 만난다. 훗날 영국의 펑크 밴드인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가 되는 말콤 맥라렌이 그 주인공이다. 1971년 웨스트우드는 맥라렌과 함께 락 문화에 영감을 받은 ‘렛 잇 락(Let it Rock)’이라는 노점을 만들었다. 이듬해 가게 이름은 제임스 딘의 영감을 받은 ‘살기엔 너무 빠르고, 그렇다고 죽기엔 너무 어리다(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로 바뀌었다가,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키는 가죽 의상을 선보이는 ‘SEX’, 무정부주의 정신을 강조한 ‘세상의 끝(World‘s End)’ 등으로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웨스트우드 역시 독립된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점차 확립해나갔다.

이 무렵 맥라렌이 관리하는 섹스 피스톨즈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며 펑크의 기호를 디자인에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1976년, 끈과 지퍼등을 사용한 본디지 웨어를 필두로 그는 도발적인 펑크 스타일을 세상에 내놨다. 그를 ‘도발적인 옷’으로 유명한 영국의 패션디자이너라고 소개한 브리태니커는 “도발적인 펑크 스타일은 대량 패션의 질서에서의 탈피를 이끌었다”면서 “싸구려 가죽과 고무, 과한 장식과 포르노그라피 티셔츠는 구세대의 금기에 반항하고 도전하는 무정부주의적 미학을 여과없이 과시했다”고 설명했다.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로 홀로 서다 = 웨스트우드는 1981년 자신의 첫 상업용 콜렉션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그리고 2년 후 맥라렌과 결별하고 독립 디자이너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다. 그는 자유로우면서 파격적인 자신의 철학을 매해 열리는 남성, 여성 콜렉션을 통해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1984년 10월 파리 콜렉션은 디자이너로서 그의 창조적 개성을 대중에게 뚜렷하게 각인시킨 전환점이 된다.

당시 웨스트우드는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인 크리놀린(단이 넓게 퍼진 스커트 속에 입었던 뼈대)을 축소시킨 이른바‘미니 클리니(Mini-Crini)’을 선보인다. 마치 미니 마우스를 연상시키는 부풀어진 ‘땡땡이’ 스커트는 미성숙함과 섹시함이 공존하는 미묘한 에로티시즘의 상징이자, 이후에도 웨스트우드만의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디자이너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오늘날 드레스, 구두, 아이웨어, 그리고 화장품과 향수를 아우르는 패션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는 여전히 매해 2개의 남성복과 3개의 여성복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펑크의 고장에 태어나 그 문화를 고스란히 패션으로 승화시킨 ‘펑크룩의 대모’는 오늘날 영국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1992년 대영 훈장 2등급을 수여받은 웨스트우드는 2006년 작위급 훈장을 받았다. 2004년에는 런던의 한 박물관에서 그의 창작품을 기리는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비비안웨스트우드 2019 가을겨울 컬렉션. 과소비를 줄이고 좋은 옷을 최소한으로 구입해 입자는 소비문화를 주문하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건 모델이 런웨이를 걷고 있다(아래). [로이터]

“적게 사고, 대신 좋은 옷을 입어라”= 웨스트우드는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패션계의 정의를 가장 잘 활용한 디자이너다. 그는 늘 콜렉션에서 단순히 트렌드를 제안하는 이상의 ‘큰 그림’을 선보인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는 “웨스트우드는 언제나 패션을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적어도 옷의 영역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말했다.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행보는 한편으로는 ‘운동가’에 더 가깝다. 그는 사형제, 환경 파괴 등 각종 이슈에 대한 메시지를 콜렉션을 통해 표현한다. 2011 봄여름 시즌 콜렉션에는 마치 사형수를 연상시키는 복면을 런웨이에 등장시킴으로서 사형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NYT는 “그는 늘 요구로 가득찬 목소리를 내는 환경 및 정치 운동가다”라고 설명했다.

2016 봄여름 콜렉션에서는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킬 수 있는 가스 개발 방식인 프래킹에 반대하는 피켓을 런웨이에 올렸다. 비슷한 시기 그는 프래킹 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하얀 탱크를 몰고 데이비드 캐머런 당국 영국 총리의 자택 앞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지난해 초 열린 콜렉션에서는 유니온잭과 EU 국기를 흔드는 모델을 등장시켜 “브렉시트는 완전한 비극”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여과없이 표현했다.

최근 그는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환경 운동가로서 가장 두드러진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 그는 2014년 그린피스의 북극 살리기 캠페인에 앞장섰고,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웹사이트 ‘기후 혁명(Climate Revolution)’을 직접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웨스트우드는 패스트 패션이 점령하기 시작한 옷 소비문화도 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인상에 남는 옷을 입으면 더 재밌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즉 양보다 질을 선택함으로써 무분별한 패션의 생산ㆍ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다.

웨스트우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패션 산업은 전 세계적 산업이다. 우리는 생산과 운송에서 생기는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소비자에게 발하고 싶은 것은 적게 사고, 잘 고르고, 그것을 자신의 마지막 옷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브랜드는 운동가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그렇지 않다”= 78세. 결코 적지 않은 나이가 됐지만 그는 “은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웨스트우드에게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도구에 가깝다. 그는 “내가 만약 (디자인을) 멈추면, 나는 더 이상 내 목소리를 가지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웨스트우드는 오늘도 ‘순응의 시대’에 살고 있는 대중에게 복종할 것인지, 혹은 맞서 싸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제안한다. 하지만 더 강력한 것은 그가 직접 외치는 구호와 메시지다. 오늘날 많은 디자이너들이 반체제 정신을 디자인에 담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도 ‘운동가’로서 웨스트우드의 행보가 두드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NYT는 “정치적 구호가 적힌 셔츠와 블레이저들이 반드시 분노나 억압에 반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입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브랜드는 운동가가 아니고 공감도 할 수 없다. 가장 감동적인 메시지는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손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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