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호남 종가의 빗장을 열고 보물을 찾는 ‘남도종가투어’

남도종가 보물투어 중 학봉종택에서 머문 뒤 ‘불원복 태극기’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참가자들./레미행 제공=헤럴드경제

고택의 겉모습 뿐 아니라 고택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과 그들의 역사까지 체험한다.

올해 한국관광공사가 승인한 10개권역 테마여행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남 담양에서 진행되는 ‘시간여행 남도종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미 오래된 한옥에서 머물며 지역 관광지를 둘러보는 ‘한옥스테이’ 상품은 있었다. 주로 영남지방의 오래된 한옥에서 ‘숙박+식사’만 맛보기 식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물리적인 한옥의 가치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교류나 소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여행 남도종가’ 프로그램은 호남 지역 고택에서 머무는 것은 물론 수백년간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과 해당 지역의 역사, 가문의 내력 등에 대해서도 듣고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층 의미가 깊다.

단순한 경치나 유적을 둘러보는 여행이 아니라, 여행지의 스토리를 체험한다는 관광공사의 테마여행 기획이 궁극적으로 찾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문화컨텐츠 기획사인 레미행의 박선주 대표는 “이전에 관광공사 테마여행에 다른 아이템으로 신청했었다가 두어번 탈락했다. 그런데 이번엔 이 지역 종가회에서 종가를 알릴 수 있는 기획을 해보자고 제안해 상품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종가들에 숨어있는 역사나 손맛 등을 발견해보자는 뜻에서 남도종가 보물투어라고 이름지었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는 “집안 일도 많은데 투어 고객들을 대접하고 청소하는 일이 부담스러울까봐 협동조합같은 걸 만들어 세탁 등의 일을 맡기려고 했더니, 종부들께서 그냥 직접 하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오랫동안 가문의 전통을 고수해왔고, 그래야만 했던 ‘종가’ 사람들이 번잡스럽게 외부인들이 내 집에 들락거리는 걸 좋아하겠느냐고 일반인들은 예단한다. 하지만 종가 사람들 중 중 적지않은 이들은 자신의 가문이 지켜온 내력과 전통에 대해 외부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학봉종택을 지키는 종손 고영준(오른쪽)-종부 이숙재님./담양=김성진 기자

남도종가투어 1박2일 프로그램 중 참가자들이 머물게 되는 학봉종택(학봉 고인후 종가)이 좋은 예다.

장흥 고씨 가문의 종가인 학봉종택은 이른바 ‘국불천위(國不遷位)’ 가문이다. 조선시대 의병장 고경명 장군이 두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함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하자 나라에서 ‘위패를 함부로 옮겨서는 안된다’는 의미의 국불천위 칭호를 내렸다. 이때문에 사가에서는 보기 힘든 사당이 집안에 있다. 또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도 지금 종손 고영준님의 증조부다. 조선과 대한민국을 거치기까지 장흥 고씨 문중 인물들이 몸 바쳐 싸운 내력을 이 투어가 아니면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고영준 종손은 “불천위(不遷位)란 국가공신 혹은 덕망이 높은 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제사를 지낼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 사불천위, 향불천위, 국불천위의 3가지가 있으며 그중 국불천위는 나라에서 특별히 정한 것으로,가장 권위가 높다”고 설명했다.

이 가문의 또 다른 자랑은 ‘불원복 태극기(不遠復 太極旗)’다

불원복 태극기는 고영준 종손의 증조부인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태극기로 ‘독립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1986년 독립 기념관에 관리를 맡긴 불원복 태극기는 세로 82㎝, 가로 128㎝의 크기로, 태극기의 흰색 바탕 위쪽 가운데에 붉은 색실로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를 수놓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 전남 구례 일대에서 항일 운동을 벌이던 의병장 고광순은 불원복 태극기를 만들어 의병 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고 한다. 이 태극기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학봉종택을 찾는 투어 참가자들은 이러한 장흥 고씨 가문의 역사를 직접 종손으로부터 듣고 사당, 불원복태극기를 볼 수 있다.

이 집안의 이숙재 종부 역시 참가자들에게 소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 고택에서 하루를 묵게되는 참가자들은 이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종가음식을 아침식사로 맛볼 수 있다. 이숙재 종부는 2년 전 농촌진흥청 주최로 열렸던 ‘종가음식 열전’에 다른 지방 종갓집 종부들과 함께 참가해 솜씨를 발휘한 바 있다.

그는 “어느 종가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특색있는 음식이 있다”며 “그때 3일동안 600명분 음식을 차리느라 혼이 났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 투어에서도 아침식사를 차려내는 일이 부담스러웠지만 조금 간소하게 한다면 할 수 있겠다 싶어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남도종가 투어는 첫날 광주에 도착하면 1000년 고찰 무등산 원효사를 찾아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하심당(홍주 송씨 광길 종가)→ 미암일기(선산 류씨 미암 종가)을 둘러본 뒤 기순도 전통장 내림음식밥상 에서 기 명인이 만든 장과 음식으로 식사를 한다. 학봉종택에 여장을 푼 뒤 공연을 보고 마을을 구경하는 것이 첫날 일정.

48년 전 시집와 전통장을 만들고 있는 기순도 명인/담양=김성진 기자

기순도 명인의 전통장을 맛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정이다. 무안에서 사들이는 콩이 한해 2000가마에 이르고, 1년에 한번 장을 담가 1200개의 항아리에서 발효시긴다. 항아리 위에는 작은 돌이 1~3개 올려져있는데 이게 된장 간장 고추장을 구분하는 기 명인의 방식이라고. 방문객들이 별 생각없이 옮기거나 버릴까봐 긴장하고 지켜본다고.

시집온 지 48년됐다는 기 명인은 자신이 만든 죽염된장을 맛본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장 담그기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딸도 함께하고 있다. “이걸 해야되느냐”며 처음에 반대했던 아들이 지금은 경영을 맡고 있다. 국내에서도 가수 이미자씨가 단골일 만큼 유명해진 기 명인의 장은 프랑스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유명 백화점에 진출하기도 했다고.

체험객들은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고추장 만들기 체험을 하는데 이를 굉장히 좋아한다.

둘째날에는 학봉종택에서 종부음식으로 아침을 든 뒤 명옥헌(나주 오씨 종가) 식영정(연일 정씨 종가) 소쇄원(제주 양씨 종가)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마무리 된다.

학봉종택에서 장흥 고씨 가문의 내력에 대해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레미행 제공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소쇄원을 비롯해 고택과 정원들이 모두 단아하면서도 아름답게 관리되어 있다.

이 투어는 회당 20명만 모집을 하는데 해외에 오래 거주한 교포들의 신청이 많다고 한다. 학봉종택의 고영준 종손은 “얼마전에 프랑스에서 미술공부하는 여자분이 어머니와 온 적이 있었는데 투어 내내 깊은 관심을 보이더라”고 설명했다.

남도투어 주관사는 8월까지 담양지역 종가투어를 마친 뒤 잠시 준비를 하고, 9월~11월에는 나주와 목포 지역 종가를 돌아보는 ’2차투어’를 할 예정이다.

이런 투어가 보통 사람은 물론 고국의 전통에 목마른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반증이다. 심신의 안정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행도 그 나름대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살아가던 우리의 것, 전통과 문화를 배우고 들을 수 있는 체험여행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진다면 국민들의 선택의 폭도 한결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테마여행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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