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애의 스크린에서 삶을 묻다]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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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지금 스무살이라면’ 하고 싶은 창작 활동을 위해 맘껏 방황하며 배움의 시간을 갖고 싶다. 음악도 실컷 즐겨보고 여행도 이곳저곳 다니며 그렇게 젊은 시절 나의 사색의 창고에 맘껏 저금을 하고 싶다. 사진은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영국 리버풀의 스트로베리 필드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2013년 겨울 리버풀에서 느꼈던 비틀즈의 체취로 한 동안 난 행복했다.

‘내 나이가 지금 스무 살이라면…..’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우선 저는 이제야 관심을 갖게 된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습니다.

술 먹느라 시간 보내고, 쓸데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생기는 거 하나 없이 바쁜 그런 영양가 없는 생활은 모두 접어두고… 오로지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 8시간은 제외하고(저는 잠이 많아서 이건 꼭 자야 합니다) 밥 먹는 시간도 좀 아껴가면서 열 대 여섯 시간은 공부만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음악이고 영화고 소설이고 시집이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듣고 보고 읽고 느끼고…

대학교 다닐 때 그렇게 가고 싶었건만, 서슬 퍼런 ’80년대에 어디 그런 딴따라 가수의 콘서트를 가겠다는, 그래서 언감생심 꿈꾸지도 못했던 들국화의 콘서트에 가서, ‘행진’을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고… 아직도 제18번인 ‘거리에서’를 불렀던 동물원의 팬클럽에도 가입하겠습니다. 가을이 되면 윤도현의 노래처럼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해 저무는 것도 모르게… 그렇게 아무 상념 없이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누구를 기다려도 보겠습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요요마의 ‘soul of the tango’ 음반과 기돈 크레머의 ‘hommage a piazzolla’ 음반, 그리고 영화 ‘탱고 레슨’의 사운드 트랙만을 들으며 탱고에만 빠져 있겠습니다. 아니 ‘탱고 레슨’을 감독했던 여감독 셀리 포터처럼 탱고 리듬에 몸을 맡겨 보는 게 더 좋겠군요. 셀리처럼 탱고에 미처 아르헨티나에 가지는 못해도 탱고 한 번쯤 배워보는 삶의 사치 정도는 저에게도 허락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열하게 아주 치열하게… 누런 200자 원고지 한 뭉치 책상 위에 놓고, 갖고 싶은 몽블랑 만년필로 -그것도 세로 쓰기로- 글도 써보고 싶습니다. 컴퓨터의 자판에만 익숙해져 있어,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몽블랑 만년필은 갖고 싶군요. 치열한 글쓰기와 몽블랑 만년필은 좀 안 어울리나요?

만약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습니다. 너무 열정 없이 청춘시절을 흘려보냈고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생각 없이 직장 다니고 돈 벌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과 앞으로의 내 삶을 아무 준비 없이 또 예전처럼 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좀 열심히 공부해 둘 걸…’ 후회를 할 때가 많습니다. 좀 더 괜찮은 대학을 졸업했다면… 좀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을 테고… 좀 더 나은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을 텐데… 세칭 일류대를 나오면 어느 정도 이 사회에서 엘리트로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는 걸 알기는 아는데… 그래서 더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영화는 바로 ‘내가 다시 청춘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비밀’이라는 일본 영화죠. 일본에서 1999년도에 개봉한 영화인데 한국에서는 2002년도에 개봉했고 이후 은근한 인기에 힘입어 2014년도에 재개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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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999년 개봉 당시 포스터.

원작 소설인 ‘비밀’은 ’99년도에 창해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98년도에 일본의 대중적인 문학상이라 할 나오키상을 받을만큼 인기를 얻었던 작품입니다. 영화 비밀의 타이틀롤은 상큼하고 깔끔한 이미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일본 여배우 히로세 료코가 맡았습니다.

원래 일본은 문학 작품의 상을 줄 때 장르에 따라 다양하게 주죠. 이 소설은 미스터리 부분의 상을 독차지할 만큼 인기가 있던 작품이었는데 영화로 제작하면서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많이 걷어내고 깔끔한 가족 드라마처럼 각색을 했더군요.

나오꼬와 그녀의 딸 모나미는 외갓집 제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관서지방으로 떠납니다. 이곳은 눈이 워낙 많이 오는 곳이라 한겨울이면 도로 양쪽이 마치 눈의 터널을 이룰 만큼 경치가 장관이지만 그만큼 운전하기에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지요.

나오꼬와 모나미는 제사에 참석한 후, 이곳에서 스키를 탈 생각에 들떠 깔깔거리며 즐겁기만 합니다. 그런데 승객이 모두 나른한 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버스 역시 졸린 듯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밤에는 트럭을 운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버스 기사가 눈 터널을 지나면서 졸았던 겁니다. 결국 버스는 계곡 아래로 떨어지고 나오꼬와 모나미는 중환자실에 실려오나 가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집에서 흰쌀밥에 명란젓을 얹어 한 끼를 때우던 스키타는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쓰는 모녀의 사고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병원을 향해 달려옵니다. 스키타가 아내의 손을 잡자 아내 나오꼬는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죠. 모나미의 손을 잡은 나오꼬의 몸에서 갑자기 빛이 나오고…

나오꼬의 영혼이 모나미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오꼬의 육체는 소멸되죠.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까요? 하지만 정신의학적으로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 한 사람의 영혼이 나머지 한 사람의 육체로 옮겨져 그 사람의 육체를 빌어 살아가는 일이 종종 보고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영화 속 자료이므로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말이죠.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머무르는 것… 이승에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두고 저 세상으로 가기 싫은 강렬한 마음의 염원이지요. 그런데 어이없게도 나오꼬는 딸인 모나미의 몸을 빼앗았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화는 비범하지 않습니다. 딸과 부부로 살아가는 스키타. 여우 같은 마누라였던 나오꼬가 아침마다 손끝으로 턱수염이 자랐나, 안 자랐나 확인해주던 일도 이제는 딸인 모나미가 해줍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스키타는 딸의 몸속에 살고 있는 아내 나오꼬의 존재를 인정하죠. 나오꼬는 자신에게 다시 한번 되돌려진 청춘시절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모나미로 살기로 하죠. 딸의 몸을 빌려 자신의 청춘시절을 다시 찾은 모나미, 아니 나오꼬는 말투에서부터 옷 입는 것, 친구들과 수다 떠는 거 하며… 심지어 예전에는 그렇게 지겹던 공부마저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재미있기만 합니다. 나오꼬는 뒤늦게 공부에 몰두하여 마침내 의대에 진학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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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재개봉시 포스터

지요.

신입생이 된 모나미에게 젊고 잘 생긴 요트부 주장이 접근을 하자 속을 끓이던 스키타는, 20대로 돌아간 아내의 싱싱한 젊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질투로 자신을 들볶아대지요. 스키타는 ‘자신은 바람 한 번 피우지 않는데 너는 청춘으로 돌아갔다고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며 젊은 놈들과 싸돌아다니느냐’라는 울분을 터트립니다.

모나미 역시 보다 젊음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 반으로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이들의 생활은 이제 버걱거리는 모래알처럼 친밀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나미는 모나미대로 삶의 윤기를 잃어가고, 스키타 역시 자신이 이미 청춘시절로 돌아 가버린 아내를 잡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면서 이제 그녀를 모나미로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죠.

이들에겐 더 이상 부부관계로 남아 있을 수 없는 넘지 못할 벽이 생긴 것입니다. 아무리 나오꼬라 해도 엄연히 딸인 모나미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있는 이상, 이들 부부는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었던 거죠. 육체관계를 맺지 못하는 부부는 늘 갈등의 씨앗을 갖고 있기 마련이지요. 어쨌든 두 번째 청춘을 맛보는 ‘나오꼬’와 소외감에 고민하는 ‘스키타’의 사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무풍선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나미가 되돌아왔습니다. 물론 아주 잠깐씩 몸 하나를 엄마와 나눠 쓰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서로에게 할 말을 편지 혹은 비디오카메라로 녹화를 해서, 아무 문제없이 1인 2역을 하며 한 집에서 삽니다. 한 몸을 살아가는 2명의 여자 때문에 오랜만에 스키타의 집안은 웃음이 가득하게 되지요.

스키타는 매일 집에 돌아와서는 2명의 여자 이름을 불러보고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가 아내인지 딸인지 확인을 합니다. 그래도 좋기만 한 스키타… 하지만 스키타는 시간이 갈수록 아내 나오꼬와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옴을 깨닫습니다. 모나미의 입을 통해, 자신들이 첫 입맞춤을 했던 등대에 엄마가 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스키타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는 이 등대에서 마지막 데이트를 나눕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나오꼬는 이 말을 남기고 이제 모나미의 몸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제 모나미는 완전히 모나미로 되돌아온 거죠.

몇 년이 지난 후, 모나미는 결혼을 합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아름다운 모나미를 눈부시게 만들어줍니다. 식이 끝난 후, 허탈하게 의자에 앉아 있던 아버지에게 모나미는 다가와 머리 숙여 인사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요. 그리고는 눈물 고인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턱밑을 부드럽게 만집니다.

그 순간 흠칫 놀라는 스키타… ‘너는 나오꼬… 그러면 나를…’ 결국 여우 같은 나오꼬의 멋진 연기에 속은 거였지만 모나미, 아니 나오꼬에게 이 비정상적인 생활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었겠지요.

스키타는 자신의 딸, 아니 아내와 결혼하는 사위가 너무 미워서 딸을 빼앗기는 아비로서 한 대, 그리고 아내를 빼앗기는 남편으로서 또 한 대… 주먹을 날려 버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다소 황당하다 싶을 정도의 스토리지만 소설로 읽었을 때는 스키타 부부의 사랑이 애절해서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지요. 영화에서는 좀 희화시킨 부분이 이런 애틋함을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춘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모든 아줌마들의 절실한 꿈을 이 영화만큼 잘 표현하고 있는 영화도 드물 겁니다. 게다가 든든하게 자신이 아내의 학비도 책임지겠다는 남편까지 있으니, 다시 한번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나오꼬의 꿈이 헛된 희망으로 보이지 않아 참 좋더 군요.

다시 나의 청춘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이 공부를 다시 해보고 싶은데… 그래서 저는 나오꼬가 부럽습니다. 지금 누군가 저에게 그렇게 말을 하네요. 공부에는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꼭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하고 싶은 의지다.

역시 의지를 밀고 나가는 집념과 끈기가 부족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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