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기업가]신분상승 욕망, 쉼 없이 자극…“루이비통 램프” 두드리다

35세때 경영난 빠진 ‘디올’ 인수…부동산 사업가서 명품계 구루 반열에

40세때 LVMH 최대주주·회장에…그룹 매출, 30년만에 30배 성장

겐조·지방시 등 70여개 브랜드 소유…1854년 ‘트렁크 메이커’로 거대한 첫발

165년 전통 이으며 “꿈을 파는 상인”명성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이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그룹 성과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AP=헤럴드경제]

프랑스의 명품브랜드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Louis Vuitton Moet Henessy)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70)이 블룸버그통신이 추산하는 세계부자순위 ‘억만장자 지수’에서 올해 처음 2위에 올랐다. 그는 무려 7년 간이나 2위였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한단계 밀어냈다.

아르노 회장은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 500위권에 오른 부호 중 재산이 가장 많이 늘었다. 올들어 재산이 390억 달러(약 46조590억원)나 증가했다. 그는 세계부호 1위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 빌게이츠 회장과 함께 재산이 1000억 달러가 넘는 ‘톱3’ 반열에 올랐다.

아르노 회장은 30여 년간 LVMH그룹 회장을 역임하면서 고속 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공격적인 M&A(인수합병)으로 그룹을 불린 그를 혹자는 ‘기업 사냥꾼’이라고 부르지만, LVMH그룹을 70여개 브랜드를 거느린 명품계의 공룡기업으로 키워냈다.

▶부동산→명품사업가로…‘공격적인 M&A’ 시작=1987년 코냑과 샴페인으로 유명한 모에헤네시와 루이비통이 합병하면서 설립된 LVMH그룹은 아르노가 그룹 회장 및 최대주주 자리에 오르면서 급성장했다. 아르노 회장은 1989년 LVMH그룹의 지분 24%를 18억 달러(약 2조원)에 사들이며 인수에 성공했다.

그는 루이비통 전 회장이던 앙리 라카미에와 손잡고 모에헤네시의 알랭 슈발리에 회장을 몰아낸 뒤, 앙리 라카미에와 경영권을 놓고 법정다툼까지 벌인 끝에 LVMH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LVMH 최대주주이자 그룹 회장에 오를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40세였다.

LVMH그룹은 지난해 매출 468억 유로(약 62조원)를 기록, 1년 만에 10% 가량 성장했다. 순이익은 63억5000만 유로(약 8조1200억원)로 무려 18%나 성장했다. 1987년 약 15억 유로(약 2조원)였던 LVMH그룹 매출은 지난해까지 31년간 30배가 넘게 성장했다.

아르노 회장은 원래 건설·부동산 사업가였다. 프랑스 북부 산업도시 루베에서 태어나 명문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뒤 아버지의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경영감각을 익힌 그는 부동산 사업에 집중했다.

그가 명품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9년 미국행이 계기가 됐다. 미국의 택시기사가 프랑스 대통령의 이름을 몰라도 프랑스의 패션브랜드 ‘디올’을 아는 것을 보고 명품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이후 미국에서 5년 간 건설업을 운영했지만 실적은 부진했다. 아르노 회장은 1984년 파산 직전이었던 크리스찬 디올의 모기업 부삭그룹을 인수하면서, 명품 패션산업에 본격 발을 딛기 시작했다. 그는 부삭의 직물부문 및 기저귀 사업을 정리하고, 직원 8000명 가량을 감원해 2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아르노 회장은 “명품 브랜드의 가치는 새 브랜드 출시보다는 기존 브랜드를 인수하는 것이 시너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또 “기업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몰락을 의미한다”며 주요 명품 브랜드 인수에 본격 나섰다.

탄탄한 자금력을 동원해 지방시, 겐조, 펜디 등 유명 브랜드를 인수했고, 메이크업 포에버, 베네피트 코스메틱 같은 화장품 업체와 태그호이어, 불가리 등 시계·주얼리 브랜드, 샤토 디켐 등 주류 브랜드까지 명품 브랜드를 70여 개로 늘렸다. 세계의 명품시장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하나의 브랜드를 소유한 뒤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가족회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아르노 회장은 이런 명품업계의 흐름을 바꿔놨다.

▶‘꿈을 파는 상인’ vs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업계의 마이더스 손으로 유명한 아르노 회장은 ‘냉혹한 사업가’, 혹은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라고 불렸다. 무차별적인 M&A로 업계 생태계를 어지럽힌다는 비판을 받았고, 잦은 정리해고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LVMH그룹이 문어발식 브랜드 확장에도 불구하고 부실경영의 우려를 접고 성장을 이어간 배경에는 아르노 회장 만의 몇가지 원칙이 자리한다. 아르노 회장은 2000년대 들어 그룹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중앙집권적 경영방식을 지양하고, 디자이너들의 소신과 창의성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훌륭한 인재를 모으는 것이 기업의 생사를 결정한다”며 인재활용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명품 브랜드들에게는 디자이너가 가장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기존의 올드한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신진 디자이너를 대거 영입했다. 1997년에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를 아티스틱 디렉터로 영입해 루이비통의 여성복 디자인을 맡겼고, 영국의 신진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에게는 크리스찬 디올의 디자인을 맡도록 했다. 칼 라거펠트, 알렉산더 맥퀸 등이 아르노 회장의 지원 아래 마음껏 능력을 발휘했다.

‘명품의 대중화’를 노린 파격적인 전략도 성장 비결로 꼽힌다. 명품브랜드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자의 신분상승 욕구를 자극해 명품을 대중화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다. 그는 자신을 “꿈을 파는 상인”이라고 불렀고, “LVMH그룹은 소비자들에게 꿈을 꾸게 한다”고 했다.

아르노 회장은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을 선보여, 특정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진 명품을 중산층까지 진입가능하도록 했다. 기존의 핸드백 보다 저렴한 가격대의 액세서리 제품을 출시해 중산층도 명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또 “완벽에 가까운 품질을 계속해서 선보인 것이 루이비통의 성공요인”이라고 했다. LVMH의 매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루이비통의 경우,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수공업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M&A의 귀재’인 아르노 회장도 몇 차례 실패를 경험했다.

인수를 추진했던 구찌는 1999년 경쟁사인 PPR(현 케링그룹)에 빼았겼고, 명품 전문 전자상거래 사이트 ‘이럭셔리닷컴’은 문을 연지 얼마 안돼 문을 닫았다. 패션계의 아마존을 표방한 ‘부닷컴’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트렁크 메이커’→‘명품계 공룡기업’…165년 전통을 잇다=루이비통은 트렁크 메이커였던 루이비통이 1854년 설립한 회사다. 궁정 황실 상인이자 목가구 제조업자였던 루이비통은 실용성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유명세를 얻어 회사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하지만 모조품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1896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했다. 2대 사장인 조르주 비통은 모방 방지를 위해 1892년 세상을 떠난 루이비통의 이니셜인 ‘L’과 ‘V’를 고안하고,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어 특허를 취득했다. 조르주 비통의 아들이자 루이비통 3대 사장인 가스통 루이비통은 과거 트렁크에 집중됐던 상품을 가구, 주얼리, 의상 디자인, 은세공업 등으로 넓혔다.

루이비통은 1970년 회장이자 CEO였던 가스통 루이비통이 사망하자 한차례 흔들렸지만, 가스통의 사위인 헨리 레카미에가 1977년 사장이 되면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는 루이비통을 국제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새 유통전략으로 독점적인 유통망 확보에 힘썼다.

1981년 뉴욕의 57번가에 새 판매점을 신설하면서 세계 무대로 확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4년에는 루이비통을 파리와 뉴욕의 증권거래소에 상장해 기업규모를 끌어올렸다. 이어 1987년에 탄생한 LVMH그룹은 당시 파리 주식시장에서 여섯번째로 큰 회사가 됐다.

루이비통은 1854년 창립 이후 고유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고급 소비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왔다. 특히 트렁크와 가방은 루이비통을 대표하는 상품이 됐다. 루이비통은 1991년 한국에 공식 진출했다.

장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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