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애의 스크린에서 삶을 묻다]육체의 학교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 육체의 학교 (L’ecole de la chair)
아주 오래전에 본 프랑스 영화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여름 극장가에 낯선 프랑스 영화 한 편이 걸렸습니다. 프랑스 영화라는 것이 늘 그렇지만 그 나른한 분위기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제가 프랑스 영화를 자주 보는 이유는 거의 관객도 없는(?) 영화관 앞자리에서 대형 스크린에 빠져들 듯한 그 몰입의 순간만큼 황홀한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등장 인물들의 작은 숨소리 하나, 동작 하나에도 의미가 부여되고, 주인공들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제 귓가에 속삭이죠. 물론 대사 하나 알아들을 순 없지만 말이죠. 게다가 아무렇게나 걸친 듯하지만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자신만의 감각으로 코디네이트 한 그들의 패션 감각하며 카페나 집안의 인테리어를 훔쳐보는 것도 프랑스 영화를 볼 때, 얻을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 중의 하나죠.

육체의 학교 포스터

‘육체의 학교’, 이름처럼 이 영화의 포스터나 홍보 컨셉은 마치 부러울 게 더 이상 없는 중년의 독신여성이 돈으로 남자를 사는, 뭐 그런 유한마담들의 이야기 같은 이미지로 포장되었습니다.

저는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유한마담이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한 관계로 부러움 반, 강한 호기심 반, 이 영화를 보게 되었죠. 게다가 제가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프랑스판으로 각색한 거라니…

이자벨_위페르

파리의 유명 디자이너인 도미니크는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중년의 독신여성입니다. 어느 날 저녁 친구와 함께 우연히 게이 바에 갔다가 바텐더인 젊은 아랍계 남자와 눈이 마주치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웃는 모습이 고혹적인 바텐더의 이름은 켄틴입니다.

도미니크는 이국적인 매력을 갖춘 켄틴에게 점점 빨려 들어가지만 켄틴은 자신의 속내를 전혀 드러내놓지 않아 상대방에게 집착의 마음만을 불러 일으킵니다.

내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나를 만나지 않는 날에는 무엇을 하는지… 내가 그를 보고 싶어 할 때 그도 나를 보고 싶어 하는지…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궁금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남자에게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일이라는 거,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생각하는 사고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안 지 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인연의 끈을 맺어 많은 하객들 앞에서 백년해로를 언약했던 부부의 헤어짐도 이런 여자와 남자의 다른 사고 구조에서 애초부터 예견된 건 아니었을까요?

아랍계 빈민층으로 동생의 치료비를 벌어야 하는 켄틴은 자신을 경제적으로 돌봐주는 이라면 그 누구와도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게 여자든 남자든 말이죠.

사람들은 켄틴을 일컬어 남창(男娼)이라고 부릅니다. 도미니크는 이 모든 사실을 켄틴이 바텐더로 일하는 게이 바의 매니저인 게이, 크리스에게 듣습니다. 게다가 켄틴은 아직도 전에 관계를 가졌던 남자 변호사와 계속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도미니크는 켄틴과 자신의 어울리지 않는 사랑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파트너로 켄틴이 변해주길 애원하기도 하고 명령도 해봅니다.

하지만 켄틴은 그런 사회적인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죠. 오히려 자신을 바꾸려는 도미니크로부터 멀어지고 싶지만 경제적인 곤궁함 때문에 여전히 그녀의 곁을 서성입니다.

켄틴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걸 알게 된 도미니크는 우연히 바에서 만난 남자와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켄틴을 향한 배신과 증오감, 상실감을 떨쳐 버립니다.

게다가 켄틴의 새로운 애인은 자신의 중요 고객인 통신회사 사장의 외동딸로 이들은 도미니크의 패션쇼 리셉션에서 처음 만나 사귀게 되었던 거죠.

이제 켄틴은 부잣집 외동딸인 새로운 애인을 위해 거리를 배회합니다. 시간당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거리의 남자가 되어 그녀와의 데이트 비용을 버는 거죠. 거리에서 켄틴을 찾아낸 도미니크는 그에게 집을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켄틴과 부잣집 외동딸은 마침내 부모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내는데 이들의 결혼을 허락한 진짜(?) 유한마담인 통신회사 사장의 부인은 브르조와 특유의 그 너그러움과 관용의(?) 정신이 느껴지도록 도미니크에게 이렇게 말하죠.

‘솔직하게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그에게 정직한 아름다움을 느꼈다’라고… 마침내 도미니크는 크리스를 통해 켄틴이 일(남창의 업무)에 열중하는 사진을 얻지만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기로 결심하고 사진과 필름을 그 앞에서 모두 태워버립니다.

이 영화는 앞에서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1964년 출간한 원작소설을 현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는 ‘애증의 나무’라는 이름으로 영풍문화사라는 곳에서 1976년도에 번역 출판됐지만 현재는 절판 상태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 중에 우리 나라에서 출간된 건 ‘가면의 고백’과 ‘금각사’ 등의 소설 외에 에세이 위주로 9권 정도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가면의 고백’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만큼 병약했던 유년시절, 자신의 숭배 대상이었던 군복 비슷한 남학생의 검은 제복에 흰 장갑, 남자의 울퉁불퉁한 근육을 만지고 싶었던 충동, 땀냄새, 겨드랑이에 거뭇하게 올라온 체모 등등이 탐미적으로 묘사된 아주 독특한 소설이죠.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의 나체 사진집을 발간한다든지 술이나 마시고 담배에 쩔어 있는 문인들의 나약하고 퇴폐적인 생활태도를 경멸하여 검도와 보디빌딩으로 근육을 키워나가는 좀 심하게 말하면 또라이 기질이 농후한 천재라고 봐야 하겠죠.

미시마 유키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목표로 육체를 단련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모습.사진 출처 / https://lwlies.com/articles/yukio-mishima-a-life-in-four-chapters/

특히 그의 또라이 기질은 천황제로 다시 복귀하자는 우익사병집단인 ‘방패회’ 결성에서 그 정점을 찍고 마침내 1970년 자위대 대원들이여 궐기하라! 며 주둔지 안에 난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가른 후, 추종자에게 일본군도로 자신의 목을 베도록 한 지상 최대의 비극적 코미디의 각본과 감독에 주연배우 역할을 하여 전세계에 그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참 최근 한국에서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검색이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었는데요… 차기 주한 일본 대사에 내정된 도미타 고지가 미시마 유키오의 사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과 일본이 최고조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현 상태에 일본 극우의 상징적 인물인 미시마 유키오의 사위가 대사로 내정됐다는 사실만으로도 메인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집단 의식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괴시키는가, 그리고 유약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왜곡되게 단련시키는가, 유년 시절 그가 탐닉했던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이 결국엔 어떻게 동성애로 구현되는가…

그는 자신의 온몸을 불살라 우리들에게 이런 인간의 원론적인 문제를 슬픈 마음으로 깨닫게 합니다.

특히 ‘동성애자일 것’이라고 추측만 난무했던 미시마의 동성애가 결정적으로 확인된, 애인(물론 남자죠)에게 보냈던 연애편지가 지난 ’98년에 발견돼 일본 문단계가 발칵 뒤집힌 바 있습니다.

그가 희대의 비극적 코미디로 자결한 후, 근 30년이 지나도록 미시마의 독특한 캐릭터는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반증이겠죠.

그런데 흥미롭죠. 제가 예전에 보았던 리처드 기어 주연의 ‘아메리칸 지골로’라는 영화도 젊은 시절 리처드 기어가 남창으로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폴 슈레이더 감독은 미시마 유키오의 열성적인 마니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시마’라는 영화도 만들었다죠. 물론 우리 나라에선 개봉되지 않았지만 말이죠.

서구 지식인층의 오리엔탈에 대한 호기심은 그 끝을 모를 만큼 집요합니다. 특히 미시마 유키오 같은, 동양인치고 꽤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한 경외는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미시마의 대표작인 ‘금각사’는 미국에서 번역 출판되어 ’50년대 미국의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었었다고 하는데, 하여간 미국에서는 노벨상을 수상했던 설국(雪國)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보다 더 많이 알려진 일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금각사
교토에 위치한 금각사의 전경. Photo by malee

하지만 일본의 대작가인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의 각오’라는 책 한 챕터인’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에서 미시마의 행동을 싸늘하게 일갈한 바 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미시마의 호화 주택, 너무나 병약하여 일본의 징집에서도 면제되어 군복무를 마치지 못할 만큼 유약했던 그가, 검도와 보디빌딩으로 강한 일본 남성의 표상이 된 것, 사람들 몰래 동성애인을 만나고 겉으로는 곤도 차림으로 마쯔리(일본의 축제 양식)에서 가마를 메고 소리를 지르며 남성의 우월성을 분출해내보이는 그 철저한 이중성…아마도 그래서 그의 자전적 소설의 이름이 ‘가면의 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최고의 원고료를 받는 작가가 아니라 원고료 한 푼 받지 않는 무명의 작가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라는 거죠. 여름의 뙤약볕에서 노동을 하고 석 장짜리 다다미방에서 살았다해도 이런 해프닝을 벌였을까라며 마루야마 겐지는 미시마의 삶에 근원적인 회의감을 표시합니다.

하여간 나이 많고 돈 많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 쓰는 영화 이외에 이제는 여자가 돈과 사회적 신분을 무기 삼아, 남자의 육체를 탐한다는 이 영화에 대한 우리 나라 대개의 언론사 영화평은 전혀 사실무근임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육체를 밝히는 장면이 거의 한 컷도 없기 때문이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하면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특히 여성들이겠죠)이라는 것과 자신의 뜻대로 소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을 이루기 위한 집착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나타난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 하나를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루어지지 않고 깨져버린 어설픈 사랑을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 소유를 이루지 못해 집착하고 질투했고 누군가를 미워했으니까요.

아니 남들은 사랑을 세련되게 잘도 끝내고 잘도 시작하는데, 나는 어설픈 내 사랑을 구걸해야 하는 치사한 감정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아닌지 사실 마음 속 깊이 끙끙 앓고 있었거든요.

사랑하는 이를 소유하려는 여인의 쫓음, 그 쫓음에 다른 뾰족한 대안도 없으면서 왠지 벗어나고파 쫓음을 쫓김으로 바꾸는 남자… 쫓음과 쫓김의 관계…

하여간 저에게 남녀간의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며 수학을 못하는 사람은 사랑 역시 못한다는 제 친구의 말처럼 지독히도 풀기 어려운 방정식이란 걸 새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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