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을 영웅으로 만들고’…NBA 전성기 이끈 데이빗 스턴 타계

선수 드래프트제 도입 등으로 NBA 산업 일궈

1일(현지시간) 타계한 데이비드 스턴 NBA 전 커미셔너가 1996년 최우수선수상을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에게 주며 축하의 악수를 하고 있다. [AFP연합=헤럴드경제]

1일(현지시간) 타계한 데이비드 스턴 NBA 전 커미셔너가 1996년 최우수선수상을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에게 주며 축하의 악수를 하고 있다. [AFP연합=헤럴드경제]

[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그는 우리를 완전히 다른 레벨로 올려 놨어요. 위대한 커머셔너이자 마케팅의 지휘자였죠. 우리 리그는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핫’합니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죠.”

미국 프로농구(NBA) LA레이커스 소속으로 전설의 선수인 매직 존슨은 1990년 USA투데이에 데이비드 스턴을 침이 바르도록 칭찬한 적이 있다.

NBA 총재(커미셔너)로서 30년간 일하다 2일(현지시간)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데이비드 스턴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겁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외신은 데이비드 스턴의 사망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NBA 사무국은 스턴 전 커미셔너가 가족 곁에서 타계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그는 작년 12월 13일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수술과 집중치료를 받아왔지만, 결국 일어서지 못했다.

변호사 출신인 스턴 전 커미셔너는 NBA 수장 재임(1984~2014년)기간 미국 프로농구를 인기 스포츠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찬사를 받는다.

무엇보다 ‘마케팅의 귀재’라는 데 이견이 없다.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 등이 마치 영화 속 ‘슈퍼 영웅’처럼 대접받게 된 데엔 그의 뛰어난 마케팅 감각이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그가 NBA에 몸담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프로농구는 TV에서 방영조차되지 않고, 밤늦게 녹화방송을 하는 홀대를 받던 처지했다.

스턴 전 커미셔너는 수장이 된 뒤 사업 구조를 확 뜯어고치는 데 착수했다. 약팀이라도 좋은 선수를 들일 수 있는 ‘드래프트제’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미디어의 큰 관심을 모았다.

NBA 소속 구단은 30개로 늘어났고, 능력이 없는 구단주는 퇴출시키기도 했다. 방송사와 수 천만 달러에 달하는 중계권 계약을 맺는 등 전성기 구가의 기틀을 다졌다. 스턴 전 커미셔너가 NBA 수장에 올랐을 당시엔 사무국엔 24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2014년 퇴임 때엔 1200명으로 늘었고 중국을 포함해 전세계에 지부도 생겼다.

스턴 전 커미셔너의 가장 의미있는 혁신으론 NBA 선수들에게 영화배우나 슈퍼영웅의 이미지를 입힌 점이 꼽힌다. 마케팅 전략의 결과로 전문가들은 풀이한다. 1990년대 농구는 축구에 최대 인기 스포츠의 자리를 내줄 위기였다. 스턴 전 커미셔너와 NBA사무국은 유럽, 남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선수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경기는 40개 언어로 200개 국가가 넘게 방송됐다. 이는 UN회원국보다 많은 숫자라고 WP는 설명했다.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도 협상해 1992년을 시작으로 NBA 선수들이 올림픽 경기에서 뛸 수 있게 했다. 아울러 디즈니를 본따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도 진출했다. 디즈니의 테마파크, 캐릭터, 의류 등을 모방해 스타 선수들의 캐릭터를 내세운 것이다.

스턴 전 커미셔너는 이런 업적들로 인해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스턴 전 커미셔너의 후임인 애덤 실버 커미셔너는 “스턴은 NBA를 글로벌 브랜드로 변화시켰다”고 했다.

스턴 전 커미셔너는 1942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뉴욕 닉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집에서 메디슨 스퀘어 가든까지 열 블럭을 걸었다고도 한다.

그는 커미셔너로 일하는 동안 NBA를 50억달러(약 5조7800억원) 이상의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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