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초비상’…대응 카드는 금산분리 완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지난 1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2020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브리핑을 통해 대기업 지주사의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보유를 허용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자리서"(지주사의 CVC 보유) 방안이 도입된다면 벤처 투자금이 신규 유입되고, 인수·합병(M&A)을 통한 회수 시장도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연합]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대기업 지주사도 벤처캐피털을 보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벤처투자 활성화 논리가 낡은 규제인 금산분리 원칙을 압도한 셈이다.

정부, 법 개정 착수…국회는 한 발 앞서 발의

6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지주회사가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검토에 막 착수한 만큼 실제 발의까지는 수개월 소요될 전망이다.

검토 방점은 '제한적 보유'에 찍혀있다. 규제를 제한적으로 풀면서도 금산분리 원칙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는 취지다. 구체적으로는 CVC의 타인자본 조달 비율과 투자 대상을 제한하고 투자 내역, 특수관계인과의 거래내역 등을 공정위에 신고하도록 할 계획이다.

CVC 보유를 허용하는 동시에 기존 공정거래법 전면개정안에 담겼던 '벤처 지주사 설립 요건' 완화도 병행해 추진한다. 다만 벤처 지주사는 제도 도입 이후 활용 사례가 없어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주사의 CVC 제한적 보유 방안만 마련된다면 입법까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입장 정리를 마쳤고 여당도 투자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일 지주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투자 활성화 논리에 금산분리 원칙 '후퇴'

자산 5조원 이상의 대기업집단 59개 중 CVC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14개(23.7%)에 그친다. 미래에셋그룹이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벤처투자 2곳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13개 대기업이 각 1개씩 둬 총 15개다. 삼성벤처투자, 카카오벤처스, 한화인베스트먼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부분 일반 기업집단 소속으로 지주회사로 전환한 SK나 현대차, LG 등에는 CVC가 없다.

공정거래법상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상호 개입을 차단하는 '금산분리 원칙' 규정 탓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문어발식 순환출자 구조를 막기 위해 지주사 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금산분리와 같은 통제 장치를 뒀다. 지주사가 금융사의 자산을 활용해 지배력 확장에 쓸 수 있고, 지주사의 위험이 금융사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대기업 지주회사는 금융업으로 분류되는 CVC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SK디스커버리는 2018년 말 SK인터베스트 지분을, 롯데지주는 지난해 9월 롯데엑셀러레이터 지분을 매각했다. 일반 기업집단에 머무는 삼성, KT, 네이버 등 일부만 보유하고 있다.

공정위는 21년 동안 지켜온 금산분리 원칙을 깨기 위해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간 지주사의 CVC 보유를 반대해왔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중소벤처기업부의 완강한 요구에 입장을 '제한적 허용'으로 선회했다.

1분기 신규 벤처투자 7년 만에 감소…금산분리 완화, 신의 한 수 될까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일 하반기 경제 정책 방향 합동 브리핑에서 "13년 연속 성장하던 벤처투자가 올 1분기에 결성액이 20% 줄었고 실제 투자액도 4% 정도 줄었다"며 "정부로서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지주사의 CVC 보유) 방안이 도입된다면 벤처 투자금이 신규 유입되고, 인수·합병(M&A)을 통한 회수 시장도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자금 상황이 여의치 않은 스타트업·벤처기업의 경우 코로나19 여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1분기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2013년 이후 처음 전년 동기 대비 감소했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차관이 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혁신성장 전략점검회의 겸 정책점검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지난 5일 제13차 혁신성장 전략점검회의 겸 정책점검회의에서 벤처기업에 대한 우려를 내비쳤다. 김 차관은 "스타트업·벤처기업의 유동성 상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며 "창업기반지원자금 5000억원 증액, 4000억원 특례보증을 실시하고 투자분 손실액 일부 지원 등 벤처투자 촉진·확대 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벤처투자업계는 CVC 보유 규제 완화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는 "배달의 민족의 경우 창립자인 김봉진 의장의 개인 지분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벤처캐피탈(VC)의 투자금"이라며 "중공업·반도체 위주로 성장한 한국 대기업들이 새로운 스타트업의 신기술을 통해 새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수요가 높아 벤처 투자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공공자본 비중이 과하다"며 "초기 유망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대기업 CVC가 늘어나면 민간자본이 늘어 스타트업 생태계가 건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kwater@heraldcorp.com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CVC는 대규모 자본을 가진 대기업이 벤처캐피털(VC)을 설립해 유망 벤처에 투자하는 금융회사다. 기업주도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대기업이 창업투자회사격인 벤처캐피탈을 자회사 형태로 설립·운영하는 특징이 있다. 주로 당장의 수익보다는 모기업과의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는 전략적 투자에 초점을 둔다.

글로벌 기업들은 CVC를 두고 스타트업에 투자를 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 자체의 벤처캐피탈인 구글벤처스다. 우버나 블루 보틀 등 유망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AI, 로보틱스 등 신기술에 적극 투자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금산분리 원칙〉

공정거래법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상호 개입을 차단하는 '금산분리 원칙' 규정을 두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문어발식 순환출자 구조를 막기 위해 지주사 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금산분리와 같은 통제 장치를 뒀다. 지주사가 금융사의 자산을 활용해 지배력 확장에 쓸 수 있고, 지주사의 위험이 금융사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산업과 금융의 결합이 시너지 효과를 낳아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등의 근거를 들어 금산분리 원칙의 폐지·완화를 주장하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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