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만들면 뭐합니까?…허울뿐인 ‘고장난 시스템’인데”

고(故) 최숙현 선수 아버지 최영희씨가 정부 관계자와 면담 도중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연합]

#1. 문화체육관광부는 관련 부처 및 체육 단체 합동으로 ‘스포츠 폭력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중략) 스포츠 폭력 근절을 위해 ‘피해선수 보호 및 지원 강화’, ‘공정하고 투명한 처리시스템 구축’, ‘폭력 예방활동 강화’ 3대 방향 10대 과제를 마련했다. (2013년 1월 문체부 보도자료)

#2. 문화체육관광부는 관계기관 회의를 개최해 협조 방안을 논의한 후 선수 폭력 방지를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폭력 사건 발생 시 단호하고 엄정한 대처가 가능하도록 조사, 징계 등의 절차도 개선한다. 문체부 정책 담당자는 “폭력에 관여한 선수나 지도자는 체육계에 발붙일 수 없도록 교육부, 대한체육회 등 관계 기관에 적극 협조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2016년 1월 문체부 보도자료)

#3. 정부는 사회관계 장관 회의를 열고 체육 분야 (성)폭력 등 인권 침해를 뿌리 뽑기 위한 범부처 대책을 담은 ‘성폭력 등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을 내놨다. 이번 대책에는 체육계 성폭력 실태 조사와 국가대표 훈련 환경 개선 대책뿐만 아니라 성적 지상주의에 기반을 둔 엘리트 체육에 대한 개혁과 더불어 스포츠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전환 등 인식 개선까지 나아갔다. (2019년 1월 언론 보도 내용)

지난달 26일 최숙현 선수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연합]

반복, 또 반복이다.

위 장면들의 날짜를 지우고 보면 최근에 발표된 내용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체육계 폭력 사건이 불거지고, 그에 따른 정부의 대책 발표가 나올 때마다 강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달 26일 전 소속팀 감독과 선수들의 폭행·가혹행위에 시달리던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유망주 최숙현 선수가 부산의 한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나를 괴롭혔던)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였다. 최 선수의 극단적 선택 이후 국민적 공분이 일었지만 이후 벌어지는 모습은 과거와 판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포츠 인권 강화를 강력 지시하며 “향후 스포츠 인권과 관련한 일이 재발하지 않게 철저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고, 문체부는 최윤희 제2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조사단을 꾸렸다. 다음 달 출범 예정인 스포츠 윤리센터에서는 체육계 비리 및 인권침해 사례에 관해 신고접수 및 조사, 상담, 법률지원, 실태조사, 예방 교육 등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체육계 내부의 대대적인 자성 없이, 뻔한 정부 대책만 나온다면 제대로 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1차 가해자는 감독과 선수지만, 2차 가해는 SOS를 외면한 각 기관들”=최 선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1차적 원인은 소속팀 감독과 선배 선수들의 폭행 및 가혹행위다. 하지만 “살려달라”는 SOS 메시지지에도 도움을 주지 않은 우리 사회 시스템 역시 최 선수의 죽음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한다. 최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1차 가해자는 감독과 선수지만, 2차 가해는 행정기관들”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해당 기관들이) 숙현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의지가 별로 없었다고 본다”는 게 최씨의 말이다.

감독과 선배 선수들의 폭행·가혹행위로 고통받던 최 선수는 지난 2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시작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소속팀이었던 경주시청에 민원을 넣었고, 3월에는 수사당국에 고소를 했다. 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최 선수 아버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숙현이의 입장보다는 가해자 측 진술에 더 무게를 두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돌아올 보복을 감수하고 큰 용기를 냈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안 보이자 최 선수는 4월엔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를 찾았다. 사법적 처벌보다 빠르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포츠인권센터는 ‘코로나 시국’이라는 이유로 대면조사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가해자들에게 전화를 해도 전화를 안 받고, 문자 메시지를 해도 답이 없다”거나 “가해자 측이 부인하고 있으니 구체적 증거를 가져오라”는 식으로 대응해 최 선수를 더 힘들게 했다는 게 최 선수 아버지의 말이다.

이후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본체 등에도 재차 호소했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최씨는 “숙현이가 ‘이번 싸움은 내가 질 것 같다. 고작 벌금 몇십만원 받게 하려 고소한 게 아니고, 엄중한 처벌로 트라이애슬론 스포츠계에서 뿌리를 뽑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다’고 가족과 친구·지인들에게 토로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 언론에 녹취록 하나만 공개돼도 온 국민이 공분하는데 그 당시에 왜 조사관들이 녹취록에 대해서 초점을 안 맞췄는지 너무 안타까운 부분”이라며 울음을 삼켰다.

앞서 지난 2017년에도 최 선수는 도망치길 원했다. 가족들에게 “경주시청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아예 운동 선수를 그만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 하지만 가족들은 최 선수가 뉴질랜드 전지훈련에서 감독과 선배 선수들의 가혹행위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 최씨는 “숙현이에게 조금만 더 힘 내서 이겨내보자고 타이르고 잔소리했던 게 가장 한이 맺힌다”고 했다.

▶전문가들 “사건 이후 전개 흐름 매번 똑같아…새로운 제도보다는 왜 시스템 작동 안하는지부터 들여다봐야”=체육계 전문가들도 최 선수의 SOS를 제대로 받아주지 못한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허정훈 중앙대 체육학과 교수(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는 “명색이 ‘스포츠인권센터’라면 피해자 중심으로 적극적인 진상 조사를 해야하는데, 피해자에게 ‘피해 사실을 증명하라’는 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은 완전히 고장난 시스템이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체육계의 강한 카르텔과 인권 감수성 부재가 주된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허 교수는 “선수들이 감독이나 체육회 직원, 소속 지자체의 체육담당 등 누구에게 문제제기를 해도 굳건히 형성돼있는 카르텔 때문에 돌아오는 건 보복”이라면서 “안 그래도 보복이 두려워 용기내는 것조차 힘든데, 용기를 내 문제제기를 해도 바뀌는 게 없다보니 선수들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구나’라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최 선수 역시 그 부분에서 큰 좌절감을 느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스포츠 평론가인 최동호 스포츠문화연구소장 역시 법과 제도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체육계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개되는 흐름이 늘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최 소장은 “선수가 고통을 참고 견디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 국민적 분노가 터진다. 정부에서는 온갖 부처를 다 동원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친다. 이후 법이 바뀐다든지 제도 개선이 되는데 그마저도 이전까지 대책으로 제시돼왔던 것들의 복사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존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니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자는 것 보다는,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왜 제대로 작동이 안되는지를 들여다보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유효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최 선수 부친 최영희 씨 역시 법과 제도 자체보다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법이나 제도를 만들기만 하면 뭐합니까. 관리를 제대로 안 하면 있으나마나 합니다. 지금처럼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줄 때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수시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적 지상주의가 체육계 병폐 근본 원인…즐기면서 운동하는 문화로 바뀌어야”=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체육계 패러다임의 변화다. 성적 지상주의, ‘국위선양’을 강조하는 엘리트 체육의 문화가 모두 비극의 씨앗이다. 그같은 문화 아래 감독과 선배 선수들의 폭력이 정당화돼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최씨는 “이제는 엘리트 체육도 운동을 즐기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강압적인 그런 훈련 방식은 이제는 지양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유소년 시절부터 ‘운동은 맞으면서 하는 게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씨는 “선수들을 때리고 욕설하고 그렇게 해야만 성적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어릴 때부터 맞고 운동해온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맞는 게 당연한 줄 알고, 그들이 지도자가 되면 선수들을 때리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번에야말로 우리 사회가 끝까지 관심을 갖고 체육계 병폐를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전에도 숙현이와 비슷한 일 있어도 언론에 보도가 안돼 묻힌 사건 있었을 것”이라며 “앞으로 가해 감독과 선수들의 수사와 재판에 계속 관심을 가져달라. 하루 이틀에 끝나지 말고 이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끝까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편, 지난 14일 최숙현 선수에게 폭행과 폭언을 한 혐의로 대한철인3종협회에서 영구제명 징계를 받은 김규봉 감독과 핵심 선수 A, 10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은 김도환 선수는 자신들에게 내려진 징계가 너무 무겁다며 모두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배두헌 기자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