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산 증인 백선엽 대전현충원 영면…논란 속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

15일 오전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고(故) 백선엽 장군 영결식에서 고인의 시신이 영정사진 앞에 놓이고 있다.[연합]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은 15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묻히며 6·25전쟁 당시 입었던 미군 전투복을 수의로 입었다. 고인이 입은 수의는 고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지점이 어디인가를 넌지시 알려준다.

그러나 백 장군의 일제 강점기 행적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이 된다. 특히 고인이 이와 관련해 진심어린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은 더 확대될 여지마저 보인다.

백 장군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를 졸업했다.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악명 높았던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 전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대상으로 108차례 토공 작전을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공식 기록만 따져도 172명에 달했다. 백 장군의 복무 시절인 1944년 7월, 9월, 11월 간도특설대가 무고한 조선인 등을 살해하거나 식량을 강탈했다는 등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도 나온다.

결국 2년 남짓한 그의 간도특설대 경력은 백 장군에게 ‘친일·반민족 인사’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그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고, 같은 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올랐다.

백 장군이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커우공원 의거 당시 현장에서 폭사한 일본 군부의 거물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사실은 친일 논란에서 백 장군의 입지를 더욱 좁힌다.

백 장군의 인생에 있어 반전은 역설적이게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온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육군 중위로 임관하고, 3년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 1950년 4월 최전방 1사단 사단장 등으로 승승장구한다. 6·25전쟁 발발 2개월여만인 8월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다가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전환되자 10월 미1기갑사단과 함께 북진해 평양을 탈환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 때 한국군 대표, 1952년 33세의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1953년 1월 우리 군 최초의 대장 계급에 오르며 초고속 승진했다.

국립묘지법 제5조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현역군인 사망자, 무공훈장 수여자, 장성급 장교, 20년 이상 군 복무한 사람, 의사상자 등을 현충원 안장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백 장군은 무공훈장 수여자, 20년 이상 군 복무한 사람 등 2개 항목에 해당돼 현충원에 묻히게 됐다.

그러나 백 장군의 친일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국회에서는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 인사들의 묘지를 이장하는 내용을 담은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지난 4·15 총선 전 이 법안에 대해 찬성한 의원이 200명을 훌쩍 넘어 이르면 오는 9월 통과될 전망이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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