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인사이트-김승현 코트라 함부르크 무역관 과장] 코로나19 시대, 독일이 보여준 유연성

독일‘ 하면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는 나라, 근면한 독일인이라는 인식만큼은 전 세계인이 공유하는 듯하다. 체계적인 독일법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의 법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은 경제정책도 ’슈바르체 눌(Schwarze Null·검은 제로)‘ 이란 원칙을 준수했다. 이는 신규 부채 없이 정부의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재정정책으로, 국채 발행 등을 통한 연간 신규 부채가 국가 국가총생산(GDP)의 0.35%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정했다.

대외적으로는 유럽 최대 경제국으로서 EU의 재정준칙(EU 회원국은 국가부채를 GDP 대비 60% 이하, 재정적자를 GDP 대비 3% 이하 유지)을 지키는 데 본보기를 보여야하고, 대내적으로는 통일 이후 급격히 늘어난 정부 지출을 통제해야 했던 독일이기에 이런 엄격한 원칙을 세운 것이다.

그 결과 독일은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년 연속 신규 순차입금 없는 균형재정을 달성했다. 또한 2019년에는 2002년 이후 17년 만에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을 60% 이내(59.8%)로 끌어내리며 EU 재정준칙 준수에도 성공했다.

물론 독일 정부가 ‘슈바르체 눌’ 원칙을 고수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 누구도 코로나19의 엄습을 예상치 못했던 2019년 8월부터 독일 경제계는 정부가 균형재정정책을 내려놓고 경기를 부양할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10월에는 유럽중앙은행(ECB) 크리스틴 라가르드 신임 총재가 독일의 재정 지출 확대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등 대외적 압박도 이어졌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와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의 입장은 단호했다. 경기둔화 우려는 공감하지만 다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한 균형재정정책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며, 신규 부채 없이도 경기 부양과 기후환경보호 등 당면한 과제에 대처할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2020년 3월 코로나19라는 블랙스완이 독일을 강타하자 ‘슈바르체 눌’ 원칙을 빠르게 내려놓고 공격적으로 가계와 기업 지원에 나섰다. 8월 현재까지 총 두 차례의 추경예산을 편성한 독일은 3월 1차 추경예산으로 1560억유로, 코로나19 위기가 장기화되자 6월에는 1300억유로 규모(2020년 집행분은 625억유로)의 2차 추경예산을 꾸렸다.

그 결과, 2020년 독일 정부의 총예산도 코로나19 위기 전 기존 예산 대비 41%가량 증가했다. 신규 부채 2185억 유로는 ‘슈바르체 눌’이 정한 신규 부채 한계선(GDP 대비 0.35%)의 18배를 능가한다.

독일이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재정정책을 통해 ‘유연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수년간 ‘슈바르체 눌’이란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키며 여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칙과 유연성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원칙과 유연성이 공존하는 독일식 실용주의가 오늘날의 ‘메이드 인 독일’을 만든 숨은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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