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칼럼-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팬데믹 시대의 여가

코로나19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우리 일상도 많이 변하고 있다. 대면 접촉을 자제하다 보니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음식과 트로트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여가란 무얼까? 역설적이다. 자유롭게 여가를 즐길 수 없으니 더 여가를 생각하게 된다.

여가(餘暇)라는 낱말은 한자어다. 일본에서는 우리와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중국에서는 휴한(休閒)이라고 한다. 한자 그 자체로 풀어보면, 우리나라에서 여가는 “여유롭고 한가한 때”를 뜻하고, 중국에서는 “한가롭게 쉰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레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레저란 그 자체 또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활동을 하는 존재의 상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두 가지를 함유하고 있다. 하나는 쓸 수 있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뭔가에 골몰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스콜레란 “그 자체로 바람직한 어떤 것에 골몰하는 상태”를 뜻한다. 고상한 음악과 시를 듣거나 아무런 다른 목적 없이 친구들과 사귀거나 생각을 닦는 것 등을 레저의 사례로 든다.

조선식으로 여가를 생각하든 서양식으로 레저를 생각하든 요즘 우리가 하는 여가와는 다르다. 열정적이지만 위험했던 전통사회에서 안전하지만 지겨운 근대사회로 변했기 때문이다. 지겨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대항운동(counter-balancing)이 일어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여가다.

신나는 음악과 춤의 세계로 안내하는 음악당, 놀라운 볼거리로 시선을 사로잡는 극장, 주말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펍, 기묘한 볼거리로 가득 찬 서커스, 기발한 이야기로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소설, 세상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건만 전하는 일요신문 등등.

근대사회는 일상생활에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폭력을 억제한 국민에게 여가라는 보상을 지급한다. 적어도 여가에는 감정을 억제하지 않아도 된다. 폭력을 통제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껏 흥분하고 스트레스를 확 풀어라!

그러나 실제로 감정을 발산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 감정발산과 폭력행사는 흉내 내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대신 그 감정과 폭력을 실제와 마찬가지로 느낀다. 실제와 똑같이 흥분(excitement)하되 행동은 모방(imitation)만 한다. 실제 폭력은 자칫 사회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헐크는 미쳐 날뛰면서 다 죽이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통쾌하게 복수를 하고, 차타레 부인은 불륜에 빠져들고, 펍에서는 곰을 두들겨 패서 피를 철철 흘리게 만들고, 필리어스 포그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갖은 모험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세상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모방흥분은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Elias & Dunning, Quest for Excitement. Sport and Leisure in the Civilizing Process.1986: p. 79-81).

만화를 보면서 마음껏 상상하라. 그러나 가상과 현실을 혼동하지 말라.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껏 사랑하라. 그러나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지 말라.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껏 응징하라. 그러나 실제로 보복하지 말라. 영화를 보는 동안 마음껏 죽여라. 그러나 실제로 살인하지는 말라. 이것이 근대적 대중여가다.

코로나 판데믹에 빠진 우리에게 근대적 대중여가가 손짓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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