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으로 들어온 연극, 시도는 신선했지만…

예술의전당의 공연 영상화 프로젝트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의 일환으로 제작된 ‘스테이지 무비: 늙은 부부 이야기’는 무대 공연에 영화문법을 더해 태어난 새로운 장르인 ‘공연영화’다. 오는 19일 전국 26여 개의 CGV 상영관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꽃분홍 중절모를 쓴 황혼의 패셔니스타가 택시를 타고 봄날의 시골길을 달린다. 주름진 얼굴엔 설렘이 가득하다. 부푼 기대를 안고 찾은 곳은 과거 인연을 맺은 점순(차유경)의 집. 이곳을 찾은 동만(김명곤)을 따라 화면은 ‘스테이지’로 시선을 바꾼다. 배우들이 점령했던 무대 위엔 카메라가 올라왔다. 점순과 동만의 몸짓과 표정을 쫓아 카메라도 움직인다. 스크린엔 두 배우의 얼굴이 가득 메운다. 연극과 영화 사이, 그 지점 어딘가에 ‘스테이지 무비(Stage Movie)’라는 새 장르가 들어섰다.

코로나19가 강타한 올 한 해, 문화예술계의 화두로 ‘공연 영상화’가 떠올랐다. 2013년부터 이미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을 시작, 공연예술을 고화질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던 예술의전당은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해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제작기간은 총 7개월, 영상화 작업엔 1억 2000만원이 들었다. 오는 19일엔 마침내 관객을 맞는다.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공개됐던 공연예술의 유료화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첫 시도였다.

‘스테이지 무비’라는 장르로 태어난 ‘늙은 부부 이야기’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에 ‘영화적 기법’을 가미한 새로운 콘텐츠다. 영화의 인트로와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야외 촬영으로 완성됐다.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면은 공연 실황으로 이어진다. 다만 공연장에서 보는 연극과 달리 수많은 카메라를 통해 배우의 클로즈업과 무대 전경, 부감샷을 담은 점이 눈에 띈다.

영상 연출을 맡은 신태연 예술의전당 제작PD는 “관객이 있는 상태에서 먼저 촬영한 뒤, 무관객 상태에서 근접 촬영을 했다”며 “후반 작업을 통해 타이트하게 편집하고, 깨끗한 음질을 확보하기 위해 후반 녹음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간 예술의전당이 구축한 영상화 사업 노하우를 발휘해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워킹을 시도하고, 인물의 표정을 화면 가득 채워 생생함을 살렸다.

제작사에 해당하는 예술의전당은 이번 작품을 전국 26여개 CGV 상영관에 걸며 “새로운 시도와 도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은 “공연 영상화 사업의 질을 높이고,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공공극장이 나서야할 때라고 판단했다”며 “공연과 문화가 만나 발전하는 하나의 시금석으로 가능성을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 김명곤은 “연극으로 만든 작품이 스크린에서 상영된 전례가 없어 지금까지 국내에선 이런 투자가 없었다”며 “예술의전당에서 과감하게 시도했고, 적극적으로 기획해 상영까지 온 것만 해도 공연 역사에서 중요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업계에선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예술의전당이 공연 영상화 사업에선 독보적 존재감을 보인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뚜껑을 연 ‘스테이지 무비’는 도전에 대한 긍정적 평가 못지 않게 아쉬운 점도 보였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높아진 눈높이와 니즈를 반영하지 못한 채 ‘새로운 시도’에만 의의를 두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컸다. 다양한 카메라 각도를 활용했으나, 이러한 영화적 기법이 연출의 의도를 완전히 전달하기에도 미흡했다.

사실 ‘스테이지 무비’는 낯선 장르다. 연극과 영화의 중간 지점에 머문 새로운 장르를 만들려는 시도가 도리어 이 콘텐츠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모호하게 했다. 지혜원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스테이지 무비’가 과연 어디에 방점을 찍는 것인지, 방향성에 대한 정립이 우선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 국립극장이 2009년부터 선보인 내셔널 시어터 라이브(National Theatre Live·이하 NT 라이브)는 철저하게 ‘연극’에 방점을 두고 영상화 작업을 한다. 배우들도 무대라는 점을 전제하고 연기를 하며, 객석이 카메라에 담겨 생생한 현장감을 더한다.

반면 영화라는 매체는 큰 스크린을 통해 극장에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 교수는 “연극과 영화의 접점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영화의 기법이 무대의 화법을 살렸는가, 무대의 경험성이 영상에서 확장했는가 등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달돼야 새로운 시도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연극의 영화화’로 첫 상업화를 시도한 만큼 관객의 눈높이와 니즈도 고려했어야 한다. 공연장을 찾는 유료 관객은 질 높은 NT라이브나 ‘메트: 라이브 인 HD’(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익숙해졌다. 온라인 플랫폼의 접근이 잦은 관객들이라면 VR, AR 등 최신 기술과 온라인에 최적화된 영상에 길들여졌고, 영화 관객이라면 고퀄리티 영상에 추구한다. 문제는 공연과 영상을 넘나드는 전문 인력의 부재에서 나온다.

김명곤은 “연극계에선 영상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부족하고, 영화에선 공연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두 장르가 만나고 충돌하면서 재밌는 시도와 작업을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지 교수 역시 이를 지적하며 “영상과 공연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 결국 한쪽의 결과물만 나오게 된다”며 “구색을 맞추는 시도보다는 연출의 의도를 반영해 작품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공연 영상화 프로젝트는 이제 첫 걸음을 뗐다. 유인택 사장은 “상업 영화처럼 대규모 상영관 개봉으로 흥행하겠다고 접근한 것은 아니다”라며 “향후 IPTV 등을 통해 수익 구조가 정착되면 어려운 예술가들에게 (수익을) 나눠주는 선순환 생태계 구축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했다. 아직 가능성은 무한하다. 부족한 예산으로 누구도 시도할 수 없었던 새 길을 개척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지 교수는 “두 매체의 접점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미디어 시대의 관객의 변화와 니즈에 맞게 공연의 혁신도 보여줘야 한다”며 “시작 단계인 만큼 꾸준한 시도를 하되 NT라이브 등의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하거나 다양한 스터디로 제대로 된 한 편의 콘텐츠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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