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정 음악감독 “오케스트라 피트가 나의 무대”

김문정 음악감독은 1997년 ‘명성황후’ 세션으로 첫발을 들인 이후 2001년 ‘둘리’를 통해 음악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20년째 업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 피트(THE P.I.T )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와 객석 1열 사이. 커튼콜이 시작되면 배우들은 무대 아래로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지하벙커처럼 움푹 들어가 어둡고 캄캄한 곳. “여름엔 따뜻하고, 겨울엔 시원하다”는 이곳은 오케스트라 피트다. “악기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냉난방을 적용할 수 없어요.” 마이크를 타고 소리가 들어가니 선풍기를 켤 수도 없다. 공연 전체를 진두지휘하면서도 무대 아래 숨은 이곳엔 객석에선 모르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연주자들은 오직 한 사람의 손끝을 향해 오감을 집중한다.

“이 자리가 저의 무대인 것 같아요. 혼자 연기를 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해요. 모두가 지쳐보이는 어떤 날엔 일부러 망가지기도 하죠. 감독이 지쳤다고 대충 지휘를 하면 그날의 음악은 어김없이 힘 없는 연주가 나와요. 힘 없는 연주에 노래하는 배우는 최고의 노래를 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관객들도 에너지가 없는 공연으로 느낄 거예요.” 무대 아래의 지휘자는 김문정 음악감독. 관객은 보지 못한 그의 얼굴엔 인생의 희노애락과 무대의 기승전결이 내려앉는다.

올해로 20년째다. 1997년 ‘명성황후’ 세션으로 첫발을 들인 이후 2001년 ‘둘리’를 통해 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 김 감독은 뮤지컬 업계에서 배우 이외의 가장 유명한 스태프로 꼽힌다. ‘팬텀싱어’(JTBC) 시리즈의 프로듀서로 시청자와 만나며 ‘조용한 카리스마’로 불렸고, 배우 못지않은 인지도와 티켓 파워를 가져 ‘뮤지컬 음악감독’의 상징같은 존재가 됐다. ‘명성황후’, ‘영웅’, ‘맨 오브 라만차!’, ‘레미제라블’, ‘엘리자벳’,‘레베카’, ‘팬텀’, ‘웃는 남자’ 등 무수히 많은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금도 ‘모차르트!’, ‘제이미’를 공연 중이며, ‘그레이트 코멧’의 연습에 한창이다.

“많이 할 때는 일 년에 11편을 했을 때도 있어요. 사실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에요. 잘해야겠죠.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해는 재공연이 불시에 많아진 해였어요.” 김 감독은 배우와 제작사들의 ‘원픽’이다. 김준수를 비롯한 배우들은 그를 “함께 하고 싶은 음악감독”으로 꼽고, 제작사는 “신뢰할 수 있는 감독”으로 꼽는다.

김문정 음악감독은 [더 피트(THE P.I.T ) 제공]

뮤지컬에서의 음악감독은 ‘슈퍼우먼’이다. 공연 내내 음악이 흐르지 않는 장면이 없기에, 음악감독의 역할은 막대하다. 작품 분석부터 배우 캐스팅, 대사와 연기에 이르기까지 음악감독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음악감독 업무의 첫 단추는 작품 분석이다.

“작품을 맡으면 가장 먼저 주제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어떤 의도에 의해 쓰였는지 분석하는 거죠.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교과서처럼 답습하고, OST를 자주 듣는 편은 아니에요. 저의 첫 감각을 믿는 편이에요. 어느 정도 연습이 완성된 후 오리지널을 들어봐요. 서로의 의도가 맞아 떨어질 때가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에요.”

원작이 있는 라이선스 작품의 경우 우리 정서와 ‘말 맛’에 맞게 음악을 다듬는 과정도 중요하다. 김 감독은 “라이선스 뮤지컬이 한국말로 불릴 때 어글리(ugly)하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뮤지컬에서의 가사는 단지 가사가 아니라 대사예요. 그만큼 가사의 디테일이 중요해요. 영어와 한국어의 어순이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른데 영어에 익숙한 연기나 표현을 고집하면 우리 관객들에게 전달할 때 어색해질 수 있어요. 그럴 때는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는 편이에요.”

완전한 무대를 위해 배우와 연주자, 음악감독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한다. 한 사람의 음악감독이 다수의 배우, 연주자와 호흡을 맞추며 ‘음악적 방향성’을 만들어간다. “음악감독에겐 배우도 연주자예요. 무대 아래의 연주자와 무대 위 연주자가 합을 맞추며 자연스러운 음악을 풀어내는 것이 감독의 숙제예요.” 150분의 공연동안 김 감독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집중한다. “음악감독이 배우와 함께 숨을 쉬어야 수십 명의 연주자들이 똑같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김문정 음악감독

“뮤지컬 음악감독이 클래식 지휘자와 다른 점은 연주자를 보지 않고, 무대 위를 보고 있다는 점이에요.” 김 감독은 자신 앞에 놓인 작은 모니터로 배우의 모든 것을 살핀다. “저는 무대를 보고, 연주자와 배우는 저만 바라보고 있어요.” 배우의 표정은 김 감독의 얼굴에 나타난다. ”배우의 감정과 표정을 공유하고 교감해야 연주가 무대 위로 올라가고, 그것이 배우에게 전달돼 관객에게 반사를 해줘요. 써클처럼 돌아가는 거죠.”

서로가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공연은 완성되지 않는다. 감독의 움직임을 따라 연주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깊은 신뢰는 오랜 시간동안 쌓였다. 건반 세션으로 음악을 시작했기에, 누구보다 연주자들의 마음과 고충을 헤아리는 그는 든든한 음악적 동지이자, 버팀목이다. 서로를 향한 믿음과 지지는 김 감독과 그의 오케스트라(‘더 M.C 오케스트라’)가 긴 시간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2005년부터 함께 한 더 M.C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김 감독과 함께 하면 “다른 것엔 신경쓰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고 입을 모은다. “늘 새로운 연주자, 낯선 음악팀과 호흡을 맞춰야 했다면 저도 힘들었을 거예요. 서로의 습성과 성향을 잘 아는 연주자들과 음악팀이 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문정 감독의 삶에 음악이 없던 순간은 없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피아노를 쳤고, 라디오와 TV 시그널을 따라친 뒤 학교에서 자랑하던 때도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대중음악계에서 세션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가수들과 호흡을 맞췄고, 뮤지컬을 시작한 뒤 음악과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매해 음악 이외의 취미를 갖는게 목표인데, 20년째 찾지 못하고 있어요.” 인터뷰 중 어딘가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자, 김 감독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내 표정이 바뀌고, 눈빛이 달라졌다. “사실 제가 음악이 나오면 이야기를 잘 못해요. 어디가 틀렸는데… 이런 걸 생각하더라고요. 직업병이죠.(웃음)” 특히나 뮤지컬 음악에 매료된 것은 다른 음악에선 찾지 못한 다채로운 색깔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뮤지컬에는 1분 짜리 짧은 음악도 있고, 15분 짜리 긴 음악도 있어요. 그 안엔 플라멩고, 오페라, 팝 등 굉장히 다양한 장르가 있고 우리의 삶이 있더라고요. 그게 참 재미있었어요. 길고 짧은 음악 안엔 인생과 감정이 담겨 있어, 듣고 있으면 그림이 그려졌어요. 어느 작품이든 뮤지컬은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해요.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고, 모두가 힘겨운 이 시기에 공연과 무대, 음악의 아름다움이 관객들에게 전달되리라 믿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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