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한국 제약史에 ‘딱 31개’…신약, 투자 없인 열매도 없다

“신약개발은 내 목숨과도 같다” 지난 2일 타계한 한국 제약산업의 1세대 인물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은 입버릇처럼 신약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약개발은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에게 이뤄야 할 하나의 목표이자 꿈이다. 한국의 제약바이오 기업들에게 신약개발은 아직 손에 잡히는 현실이 아닌 셈이다. 바이오시밀러와 CMO(위탁생산) 분야에서는 ‘엄지척’을 받을 만큼 글로벌 수준에 이른 한국이지만 유독 신약개발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제약사 100년에 신약 31개…최근 2년간 ‘0’=제약산업은 일반적인 하나의 경제분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신약개발을 통한 질병의 퇴치라는 공공재 성격도 갖고 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 각국의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이윤을 따지지 않고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때문에 한 나라의 제약산업을 평가할 때 자국에서 개발한 국산신약이 얼마나 되느냐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아직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제약 역사는 지난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기업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이 세워진 뒤 100년의 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지금까지 자체적으로 개발에 성공한 신약은 2020년 현재 31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지난 1993년이 되어서야 국내 1호 신약이 허가를 받았다. 이후 2000년대 들어 거의 매년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이 1~2개씩 허가를 획득하며 우리나라도 제약 강국에 올라서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졌다.

하지만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 대부분은 시장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아예 매출이 발생하지 않아 개발사가 품목 허가를 취소한 경우도 있다. 현재 허가를 받은 31개 품목 중 현재 4개 품목은 허가가 취하되거나 취소된 상태다. 계속 판매가 되고 있는 품목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사실상 매출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품목이 상당수다.

특히 지난 2018년 ‘알자뷰주사액’과 ‘케이캡정’이 국산 신약으로 허가를 받은 뒤 2년간 국산 신약은 나오지 않고 있다. 식약처의 신약 허가 현황에 따르면 지난 해 승인된 35개 신약 중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은 없고 모두 수입의약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2010년 이전에 개발된 신약들은 이후 더 업그레이드된 제품들이 나오면서 사실상 시장에서 팔리지 않고 있다”며 “국산 신약이라는 상징성만 있을뿐 박물관에 있을 법한 유물과도 같다”고 말했다.

이어서 “2020년대 들어 신약으로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기존 약보다 훨씬 우수한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하거나 치료제가 전혀 없던 분야에 대한 신약이 되어야 해 전보다 허가받기가 훨씬 까다로워졌다”며 “이런 환경에서 국내 개발 신약이 나오기는 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상장 제약사 전체 R&D 투자액 2조원…로슈 한 곳이 14조원 투자=이처럼 국산 신약이 꾸준히 나오기 힘든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신약개발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신약개발은 성공 확률도 낮고 개발 기간도 오래 걸린다. 때문에 하나의 신약이 나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지속적인 투자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제약바이오사 중 이런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는 기업은 몇 곳 되지 않는다. 국내 제약사 중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유한양행의 한 해 매출은 1조5000억원 정도다. 통상 하나의 신약개발에 조 단위가 들어간다고 할 때 한 기업이 이런 금액을 투자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익명을 원한 제약관련 대학 교수는 “신약개발 후보물질 한 개당 1조원, 전임상 단계에서만 약 1000억원 정도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모험적인 투자를 할 만한 국내 제약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라며 “경영진들은 이런 리스크(위험요인)를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서 “적은 투자도 문제지만 대학에서 좋은 후보물질을 찾더라도 기업들이 이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실제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연구개발(R&D) 투자액은 2018년 기준 110여곳의 상장 제약바이오 기업의 합계 금액이 2조5000억원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 국내 제약바이오사들의 연구개발 투자액은 지난 2011년 9700억원, 2015년 1조5700억원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다. 국내 제약사 중 연구개발에 가장 많이 투자한다고 알려진 한미약품의 경우 지난 해 2098억원을 R&D에 투자했는데 그나마 이는 매출액(1조1100억원)의 18.8%에 해당하는 비중이다.

반면 글로벌 제약사 중 가장 많은 연구개발비를 지출하고 있는 로슈의 지난 해 R&D 투자액은 120억6000만달러(약14조2000억원)에 이른다. 한 기업의 한 해 연구개발 투자액이 국내 상장 제약바이오 기업 전체 연구개발 투자비보다 7배 정도 많은 셈이다.

신준수 식약처 바이오의약품정책과장은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과 글로벌 제약사들의 투자 규모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런 투자를 통해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신약이 나올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어렵다보니 국내 개발 신약이 나오는 것이 쉽지 않은 환경”이라고 말했다. 손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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