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3막 지휘 마에스트로…그에겐 정년도 은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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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필을 떠나는 로린 마젤

마에스트로 로린 마젤(79)이 이달 27일 연주를 끝으로 뉴욕 필을 떠난다. 이별 날짜를 받아 놓은 뉴욕 필의 팬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그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거장에게는 ‘정년’이라는 말도 ‘은퇴’라는 말도 없다. 여든을 목전에 둔 고령이지만, 뉴욕 필을 떠난다고 해서 지휘봉을 놓을 생각은 결코 없다. 그는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의 다양한 활동 계획을 공개하며, 음악가로서 인생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처음부터 ‘지휘자’로 태어난 음악가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신동(神童)은 많지만 지휘의 신동은 지극히 드물다. 지휘자는 작품에 대한 냉철한 분석력, 작곡가의 사상과 철학을 읽어내는 통찰력,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100여개의 파트를 한꺼번에 조망하는 넓은 시야와 지도력 등 어린 나이에 갖추기 어려운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연주자나 작곡가로 경력을 쌓다가, 어느 정도 관록이 생긴 뒤에 지휘를 시작한다.
 
그러나 로린 마젤은 처음부터 지휘자로 타고났다. 1930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태계 러시아인 아버지와 헝가리와 러시아 혼혈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아기 때 미국으로 이주한 뒤 ‘음악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네 살 때 바이올린과 지휘 공부를 시작했는데, 악보를 한 번 보면 사진 찍은 것처럼 암기하는 비상한 두뇌와 절대음감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정식 지휘수업을 받아, 여덟 살에 아이다호 대학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아홉 살에 뉴욕만국박람회에 출연, 인터라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지휘 신동’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열두 살에는 뉴욕 필하모닉을 비롯해 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들과 순회연주를 펼칠 정도였다.
 
마젤이 음악은 천부적인 재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다. 그의 증조부는 러시아 황제 취주악단의 수석 지휘자였고, 조부는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다.
 
하지만 마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음악가로서의 탄탄대로를 뒤로 하고, 피츠버그 대학에 진학해 어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학을 마친 뒤 다시 음악으로 돌아왔다. 1949년 피츠버그 심포니의 단원 겸 부지휘자가 된 것이다.
 
1951년 그는 또 한 번 미국에서의 화려한 인생을 포기하고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떠났다. 그 곳에서 바로크 음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한 편 지휘를 공부했다.
 
이후 그는 도이치 오퍼 베를린, 베를린 라디오방송교향악단, 빈 국립오페라극장 등 유럽 악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것은 50대가 되어서였다. 클리블랜드 교향악단, 피츠버그 교향악단 등 미국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쿠르트 마주어의 후임으로 뉴욕필에 입성했다.
 
뉴욕 필과의 음악인생, 그 명암
 
마젤의 연주력은 이미 널리 증명된 상태였지만, 뉴욕필에 온 뒤 그에 대한 평가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2004년 그가 뉴욕필과 계약을 연장할 무렵, 다른 명문 오케스트라들은 새파랗게 젊은 지휘자를 받아들여 ‘세대 교체’ 바람을 일으키던 터라, 나이 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천하의 로린 마젤’도 레너드 번스타인 시절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주빈 메타, 쿠르트 마주어로 이어지면서 날개 없이 추락한 뉴욕필의 명성은 마젤의 재임 기간에도 반전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라는 상징성만 남았을 뿐 더이상 초일류 악단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잔혹한 평가도 받았다.
 
유럽에서 전성기를 보낸 뒤 노년에야 뉴욕필을 맡은 마젤에게는 이런 평가가 혹독하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없이 “이제는 뉴욕필도 청중을 찾아가야 한다”며 대중화 전략을 내세웠고, 음악 교육 사업 등 오케스트라의 사회적 기능을 강화했다. 그 덕분에 뉴욕필을 우러러보는 이들은 줄었지만 친근하게 느끼는 이들은 늘었다.
 
뉴욕필과 함께 한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지난해 100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북한 평양을 방문해 연주한 것이다. 마젤은 미국과 북한의 국가를 차례로 지휘하면서 세계인들에게 ‘핑퐁 외교에 버금가는 ‘싱송(sing-song) 외교’의 위력을 보여줬다.
 
그래서인지 마젤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대단하다. 퇴임을 앞둔 요즘, 뉴욕필 홈페이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메시지와 사진들이 별도의 섹션에 게재돼 있다. 
 
뉴욕 필과의 이별, 그 후
 
2014년까지 그의 연주 일정은 빈틈 없이 빡빡하다. 뉴욕필로부터 연봉 2800만 달러(35억 4600여 만원)의 특급 대우를 받았던 ‘비싼 몸’이지만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지휘 요청이 밀려 든다.
 
그는 2008~2009년 시즌의 공연이 끝나는 이달 말 뉴욕필을 떠나, 앞으로 2년간 스페인 발렌시아 오페라 하우스(Palau de les Arts Reina Sofia)의 예술감독으로 일할 예정이다. 또 2009~2010년 시즌에는 빈 필하모닉,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투어를 떠난다. 물론 객원지휘자의 자격으로 뉴욕필을 지휘할 수도 있다.
 
12년 전부터 매년 여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최해온 서머페스티벌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그가 ‘농장(Farm)’이라고 부르는 550에이커(2만 2258㎡) 규모의 전원주택 부지 안에는 131석 짜리 작은 연주홀뿐 아니라 200여 명의 참가자가 머물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뉴욕필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지휘 마스터 클래스도 열 예정이다.
 
그는 “아직 은퇴 계획은 없다”며 “95세쯤에 조기 은퇴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마 그 때가 되면 다시 마음이 바뀔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로 106세인 그의 아버지가 아직 건재한 것을 보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소민 기자
그래픽=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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