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나이에 내과전문의 된 강신욱 원장의 드라마같은 삶

LA의 슈바이처를 꿈 꾸는 목사겸 의사…”치료하며 하나님의 치유 과정 도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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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넘긴 나이에 목회 활동을 하던 중 의사면허를 딴 강신욱 내과전문의. 한인동포사회의 슈바이처같은 의료선교를 꿈꾸고 있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의사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다. 학부 과정을 거쳐 메디컬 스쿨까지 보통 10년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끈기와 명석한 두뇌가 없으면 언감생심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쓰레기는 의대생이면서도 신촌 하숙집의 여러 후배들을 두루두루 챙기는 인간미 넘치는 멋진 선배로 그려졌다. 이를 두고 의대 공부가 얼마나 힘든 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얘기라 평가절하할 것이다. 의사 국가고시를 준비하고,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고행의 길이다. 하지만 이곳 LA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 있다. 불혹을 훌쩍 넘긴 45살의 나이에 미국 의사가 된 강신욱 목사의 감동적이면서도 파란만장한 삶을 들여다보자.

▲Never too late

늘 가난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부친이 42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운 탓에 어머니를 도와 생업에 매달려야 했다. 중학교 입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재수 끝에 들어간 숭실고등학교는 그가 5년만에 다니는 정식 학교였다. 대학도 1차에서 떨어진 후 감리교 신학대학으로 진학했다. 목회 생활을 하다 카운셀러를 꿈꾸며 1980년 아내와 어린 세 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수중에는 교인들이 건네 준 75달러가 전부였다. 아내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패서디나 칼리지에서 힘든 유학 생활을 하던 중 의사가 되라는 영감을 받고 UCLA로 편입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무슨 의사가 되겠냐는 비아냥거림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밤을 꼬박 새우며 처남이 운영하는 도넛 가게에서 밀가루 반죽을 빚었고, 낮에는 수재들도 버거워하는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린 끝에 1994년 로마린다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그가 의사가 되리라 마음 먹은 지 9년만에 얻어낸 쾌거였다. “45세에 졸업장을 받았으니, 최소한 35년은 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80세까지 한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기뻤습니다.”

▲Two job

1998년 오하이오주 케터링 병원에서 수련의를 수료하자마자 ‘생수의 강’ 교회를 개척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LA 한남체인 건너편 빌딩에 ‘강신욱 내과’를 개업했다. 병원 개업보다 교회 개척을 먼저 한 것이다. 간혹 의사를 하다 목회자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목회를 하다 의사가 된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그렇다면 그의 메인 잡은 무엇일까.

“당연히 목사가 첫번째 잡이고, 의사는 그 다음입니다”라는 답을 듣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의과대학 오리엔테이션 때 ‘의사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을 치료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 가슴으로 와 닿았습니다. 치유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을 도와 더 좋은 삶의 질로 이끌고 지속되도록 돕는 게 의사의 역할입니다.”

투 잡을 뛰는 그의 스케줄은 늘 분주하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다 일요일에는 목회자로서 예배를 인도한다. 다시 월요일과 화요일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나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휴일은 수요일 뿐이다. 하지만 수요일에도 LA에서 80여마일 거리에 있는 필란의 수양관으로 가서 주일 설교 준비 및 집필 활동에 매달리기 때문에 사실상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셈이다.

▲ Vision

“병원을 운영하고 있기에 교회에서는 따로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UCLA 캠퍼스 목사 사례비를 제가 부담하고 있죠. 사실 돈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사로서 환자의 육신을 잘 치료할까, 목사로서 상처받은 영혼을 잘 치료할까 늘 고심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되기 전까지 워낙 가난한 삶을 살아왔기에 없는 자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는 평생 의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그가 1년에 서너번 의료 선교를 가는 이유다. 혼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뜻을 같이 하는 예닐곱 명과 그룹을 이뤄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등으로 떠나 사랑의 의술을 펼치고 있다.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포스터 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을 가진 목사님 두 분이 계셔서 12명까지 버려진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실의에 빠져있는 환자들을 위한 ‘힐링 캠프’도 곧 시작할 계획입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온화한 얼굴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됐다. 손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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