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의 무비 for U] ‘더 기프트’, 어떤 과거는 현재를 잠식한다

‘더 기프트’(The Gift). 스릴러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처럼 보인다. 선물이란 받으면 으레 기분 좋은 것 아니던가. 작은 선물에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기도 하고, 상대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한다. 보내는 사람에겐 상대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반면, 어떤 관계에선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반갑지 않은 인물의 호의라면 찜찜할 수 밖에. 보내는 입장에서도 반갑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위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선물’이 멜로나 휴먼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스릴러에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이먼(제이슨 베이트먼 분)은 아내 로빈(레베카 홀 분)과 함께 고향 인근의 교외로 이사온다. 그곳에서 고교 동창 고든(조엘 에저튼 분)을 우연히 만나고,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고든은 그날부터 사이먼 부부의 주위를 맴돌고 이따금 선물까지 보내온다. 때마침 불길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부부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사이먼과 고든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는 걸 직감한 로빈은, 과거 두 사람의 사이에 있었던 일에 의문을 품는다. 


‘더 기프트’는 바로잡지 못한 과거가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과정을 그린 심리 스릴러다. 수면 위에 조약돌을 던지면 파문이 번져나가 듯, 동창과의 재회라는 사소한 사건이 부부의 일상과 관계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로빈은 불쑥 찾아오는 고든 때문에 홀로 집을 지킬 때면 두려움을 느낀다. 게다가 사이먼이 고든을 지나치게 냉대하면서, ‘그가 앙심을 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가슴졸인다. 로빈은 과거를 숨기는 남편 사이먼에게도 거리감을 느낀다. 세 인물 간 고조되는 갈등과 팽팽한 긴장감, 사건의 열쇠를 쥔 고든의 의뭉스러운 표정, 로빈을 훔쳐보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은 긴장감을 직조해내는 스릴러 장르의 사명을 다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일상에 찾아든 불안과 공포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나 피칠갑 살인사건 이상으로 섬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애니메이션 ‘쿵푸팬더’에서 시푸 사부는 팬더 포에게 주옥같은 조언을 건넨다. “어제는 과거고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 현재는 ‘선물’이기 때문에 ‘프레젠트’(present)인 것”이라고.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떤 과거는 현재를 집어삼킬 만큼 깊고 어둡다. 자신의 과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그렇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었다면, 그 과거는 결코 ‘지난 일’이 될 수 없다. 위안부를 강제 동원 및 착취한 것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 일본의 행태가 비난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까마득한 과거가 됐지만, 25년 전 고든과의 관계가 어긋난 당시는 사이먼에게 ‘현재’였다. 먼 과거가 되기 전, 그가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으려 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을 지 모른다. 부부에게 찾아든 혼란과 불행도 없었을 터. 사이먼이 덮어두려했던 과거는 고마움의 표시가 아닌 다른 의미의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고든의 싸늘한 일갈은 관객에게도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게 한다. “과거는 털어버려도 널 따라다녀.”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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