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관용의 날이지만…] 대한민국은 지금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경쟁 위주’ 일상 스트레스에 국정농단 파문까지

-박 대통령 檢 조사연기, 서면조사 요구…분노에 기름 끼얹어

-전문가, “평화 시위 양상 달라질지도…장기화 시 사회 시스템 마비 우려”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1. 공무원 양모(50) 씨는 최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난 수년간 열심히 한 일이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에 이용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 ‘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화가 치밀었다는 양 씨지만, 이젠 무력감마저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 씨는 “담화를 통해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고 밝혔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약속은 15일 대통령 변호인의 서면조사 요구 및 조사 연기를 통해 진심이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지금껏 신분 때문에 자제했지만 다가오는 주말부터는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진=최순실 씨의 국정농단과 이를 막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의 무능에 대한 분노는 지난 12일 광화문 100만 촛불시위로 표출됐다. 박현구 기자/pkho@heraldcorp.com]

#2.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에 굴착기가 한 대 돌진했다. 이 과정에서 막아섰던 경비원이 크게 다쳤고 대검 민원실 방향 출입문과 차량 안내기 등 시설물이 손상됐다. 경찰 수사에서 정 씨는 현 정권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60ㆍ여ㆍ최서원으로 개명) 씨가 검찰에 출두하면서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에 분노해 “(최 씨가) 죽는 것을 도와주러 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16일은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 관용의 날(International Day for Tolerance)’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은 그동안 과도한 경쟁속에 살아가던 일상으로부터 받던 스트레스는 물론,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최 씨의 국정농단 혐의와 100만 촛불 민심을 보고도 이렇다 할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관용을 논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문가들 역시 분노의 축적이 사회적으로 끼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주변에서 우울증의 일종인 ‘화병’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학계에는 국내 전체 인구의 5% 정도인 250만명 가량이 화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화병은 지난 1995년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영문식 표기를 ‘hwa-byung(화병)’으로 결정하는 등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문화증후군이다.

분노의 축적 양상은 범죄발생 추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살인미수 범죄자의 범행 동기 중 우발적 범행이 38.2%로 가장 많았다. 폭력범죄 중에서도 우발적 범행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2011년에는 전체 폭력범죄 39만2042건 중 46%가 우발적 범행, 2012년과 2013년에는 각각 17만6834건, 16만3260건 중 44%로 절반에 가까운 범행이 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이윤호 동국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이나 최 씨의 딸 정유라(20) 씨의 입학 및 학사관리 비리 등의 경우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집단적인 무기력감과 열패감을 줘 평소 분노 조절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이를 표출하려는 욕망이 커질 수 있다”며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나 경험이 부족한 가운데 계속해서 새로운 사회 문제가 터져 나오다보니 일반인들조차 분노를 제대로 억제하기 힘든 경우가 발생할까 염려된다”고 분석했다.

과거에 비해 복잡해진 인간 관계 탓에 발생하는 갈등에 더해 최근 발생한 사건들로 인한 분노까지 더해지는 양상이 장기화됨에 따라 사회적 안정성까지도 해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12일 시위에서 성난 시민들은 100만명이 모인 가운데서도 전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을 정도로 질서를 유지하며 의견을 전했지만, 인내에도 한계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잘못에 대해 진실되게 책임지는 모습 대신 버티기로 일관한다면 시위의 양상도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분노와 갈등 국면이 지속된다면 이는 곧 사회 시스템의 마비로 이어질 수도 있어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realbighea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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