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당선이 부른 포퓰리즘시대…원인은 反주류 아닌 진보의 실패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 세계에 던져준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파괴와 급진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의 시대를 알리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포퓰리즘은 세계의 거대한 흐름이 됐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는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당선으로 나의 승리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할 정도다. 스웨덴에서는 트럼프의 당선을 이유로 600여명의 극우주의자들이 네오나치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브라질에서도 극우성향의 인사가 ‘브라질의 트럼프’가 되겠다며 2018년 대선 출마 가능성을 내비쳤다. 다음달 열리는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재투표, 이탈리아의 개헌관련 국민투표 모두 포퓰리즘의 사정권 내에 있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미국민들은 그의 ‘담대한 희망론’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 희망에 절망한 미국 백인들은 희망이 아닌 차별과 분노를 외치는 트럼프를 당선시켰다.

앤드류 바세비치 보스턴대학교 교수는 트럼프 당선의 배경에는 ‘반(反)엘리트 정서’가 아닌 ‘진보의 실패’가 있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재벌 2세로 전형적인 경제적 ‘기득권 세력’이다. 경쟁자 힐러리 클린턴과도 사업을 목적으로 친분을 유지했고, 각종 정치인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정치경력이 전무하다는 이유로 트럼프는 기성정치에 대항하는 이른바 ‘아웃사이더’로 평가됐지만, 결국 행정부 후보명단에는 트럼프가 후원을 했던 정치인이나 지인, 심지어 가족들이 올랐다. 이들 모두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토록 끔찍하게 싫어했던 ‘기득권 세력’이다.

CNN 출구조사를 보면 힐러리 지지자들보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의 개인소득이 훨씬 높다는 점도 곱씹어 볼 대목이다. 에릭 카우프만 런던대학 버크벡칼리지 정치학 교수는 유고브와 폴리시 익스체인지, 버크벡칼리지가 공동으로 진행한 여론조사를 통해 백인 유권자들이 ‘이민정책’을 중심으로 트럼프 지지자와 혐오자로 나뉘었다고 밝혔다. 경제지표와 상관없이 미국 진보세력(liberal)이 주창해온 세계화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이 더 큰 변수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진보주의ㆍ복지주의 정책에 미국민들은 희망을 걸었다. 지난 2008년 금융불안이 세계 각국에 불어닥쳤지만 미국은 양적완화, 의료보험 확대, 최저임금 인상 등 대대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는 없었지만 미국 경제지표는 조금씩 개선됐다. 경제지표만 보면 미국의 경제는 견실하다. 2014년과 2015년 각각 2.5%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했고, 지난 10월 기준 실업률은 4.9%에 그쳤다. 외부에서 볼때 오바마의 진보정책은 미국을 다시 번영의 길로 천천히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인노동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5년 사이 미국 중산층의 비중은 전체 61%에서 50%로 감소한 반면 고소득층은 14%에서 21%로 증가했다. 빈곤층은 25%에서 29%로 늘었다. 빈부격차가 증가한 것이다. 문제는 빈부격차에 세계화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조지 보하스 하버드대학 교수는 이민노동자의 유입이 노동자의 소득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아터 매사추세츠 공과(MIT)대학교 교수도 미국의 대중무역 확대가 자국 내 제조업의 몰락과 장기실업을 초래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백인의 인구비율은 2005년부터 2015년 사이 66%에서 62%로 감소한 반면, 히스패닉은 15%에서 18%로, 흑인은 12%를 유지하는 등 인구학적으로 유색인종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소수자와 다수자가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미국 내 계급간 심리적ㆍ지리적 거리감도 진보주의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다. 미국 동부의 고학력 고소득층은 중남부 백인 중산층을 ‘힐빌리’ 혹은 ‘레드넥’이라고 비하했고, 레드넥과 힐빌리들은 동부의 백인을 ‘양키’라고 폄하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는 ‘급증하는 무식쟁이 백인 하층계급’을 ‘차브’라고 한다. 미국과 영국 사회에서 차브와 레드넥, 힐빌리들은 ‘무식한 백인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오언 존스 영국 노동당 연구원은 차브라는 단어가 “폭력, 게으름, 청소년 임신, 인종주의, 주정 같은 노동계급의 부정적인 특징과 연결된다고 지적했다. 텔레그래프의 수석기자 크리스토퍼 호스도 “많은 사람들이 차브를 낮은 계급에 대한 혐오를 위장하는 말로 사용한다”라고 비판했다.

자신을 힐빌리 출신이라고 밝히는 V.D. 반스 뉴욕타임스(NYT) 객원 논설위원은 “문제는 백인 노동자층이 사회로부터 느끼는 소외감, 단절감이다”라며 “유색인종은 보호대상이라면 백인 노동자들은 ‘게으름’의 상징이자 혐오대상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백인 노동자계급의 분노는 다문화주의를 강조하는 진보 가치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연한 백인 노동자층에 혐오에 대한 절망에서 시작됐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의 슬로건에는 체계가 없다. 불만을 뛰어넘어 어떻게 다시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 설계가 부족하다. 그런데도 영국민과 미국민이 브렉시트 운동을 이끌어온 핵심세력인 ‘영국독립당’(UKIP)과 트럼프 편에 선 것은 이들이 ‘권위주의형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 출구조사 유권자들은 지도자를 선택한 중요 기준으로 강력한 지도자를 꼽았다.

문재연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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