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의 영화X정치] 손석희 vs 박근혜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좋습니다. 만약 홀드먼과 얼리크먼의 주도로 일어난 일이라면, 당신이 그 일(민주당 도청, 워터게이트)을 알게 된 후에는 왜 체포 수사를 지시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또 다른 진실 은폐가 아닙니까?”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숨이 가빠졌다.

“아마도 그래야 했겠죠. 연방수사관을 사무실로 불러 그 두사람을 끌어내려 감방에 쳐넣으라고 했어야 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 홀드먼과 얼리크먼을 어릴 때부터 잘 알아요. 가족들도요. 뿐만 아니라 저는 그들에게 무엇을 하든,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범죄가 될 수 없다고 말해왔어요. 이런 자리(공직)에 있으면 합법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해야됩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불법이지만, 더 많은 국익을 위해서입니다.”


닉슨이 미끼를 물었다.

앵커 데이비드 프로스트가 바로 낚아 챘다.

“잠깐만요…. 제가 들은 것이 맞나요? 정말로 대통령이 때로는 국익을 위해 불법적인 일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닉슨은 완전히 낚였다.

“내말은 그러니까, 대통령의 불법 행위는, 불법이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프로스트는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내 신념이오. 그러나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됐소.”

“그러니까, 다시 한번 명확히 하자면, 당신은 (워터게이트) 진상은폐에 가담했고, 불법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죠?”


▶프로스트 vs 닉슨

론 하워드 감독의 2008년작 ‘프로스트 vs 닉슨’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전설적인 방송 언론인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와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 사이에 이뤄졌던 1977년의 세기적인 인터뷰를 그렸다. 당시 인터뷰는 4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시청한 최대의 방송 이벤트였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탄핵 위기에 처하자 직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3년 후 인터뷰가 이뤄질 당시 닉슨은 정계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한때 잘 나가던 앵커였지만 인터뷰 직전에는 3류 연예 토크쇼나 진행하던 한물간 방송인이었다. 닉슨에게 계약금 60만달러와 방송 수익 일부가 약속된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모두 ‘인생역전’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닉슨은 노회한 정치가였다. 며칠간의 인터뷰에서 닉슨은 프로스트를 완전히 ‘녹 아웃’시켰다. 대중들이 원한 것은 워터게이트의 진실이었으나 인터뷰는 닉슨의 압도 속에 그의 치적을 선전하는 장이 돼 버렸다. 그러나 마지막에 프로스트는 닉슨에게서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결정적인 발언과 미국민들에 대한 사죄를 이끌어낸다.

▶손석희 vs 박근혜

이 인터뷰는 비록 닉슨의 하야 3년 후에나 이뤄진 것이지만, 여러모로 최근 국내 정치ㆍ사회적 상황을 연상시킨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이 있었던 지난 10월 24일 이후 지금까지 흘러온 과정이 그렇다. 민심을 중심에 두고 언론ㆍ정치권과 박 대통령ㆍ청와대가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는 형국이다. 물론 결정적인 계기는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가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있던 바로 그날 저녁 최순실씨의 것으로 보이는 태블릿PC를 단독 입수해대통령 연설문 유출을 폭로한 것이다. 이로써 미르ㆍK스포츠 재단 의혹을 ‘개헌논의’로 돌파하려던 박 대통령의 시도는 실패했다. 박 대통령은 1차 사과를 했으나, 민심은 반성과 개선의 태도 없이 진상을 은폐하려는 데에 분노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뒤집는 언론의 추가 폭로가 이어졌고, 결국 박 대통령은 다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해 최순실씨와의 관계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여전히, 최순실 게이트와의 직접적인 연관을 부정하는 박 대통령과, 이를 수사해 진상규명을 해야 하는 검찰, 연일 후속 폭로를 이어가고 있는 언론의 ‘수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이 상황만을 놓고 보면 마치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결같은 국면이다. 그리고 ‘손석희’는 국민을 대신해 진상을 밝히고 민심의 요구를 전하는 언론의 ‘상징’이 됐다. 

▶워터게이트 vs 최순실 게이트

프로스트와의 인터뷰를 포함해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전 과정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와 놀랍도록 닮았다. 도둑들로 보이는 몇 명이 민주당을 침입한 사건으로부터 닉슨 정부 전체를 덮는 대규모 비리 스캔들로 발전한 점부터 그렇다. 도청 그 자체에 대해서도 백악관은 “우리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잡아 뗐다가 폭로가 이어지자 닉슨 대통령이 “나는 몰랐던 일”이라고 은폐하려 했던 과정도 이번 사태와 전개 과정이 비슷하다. 닉슨은 홀드먼과 에얼리크먼 등 핵심 참모만을 해임한 채로 사건을 봉합하려 하기도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핵심적인 증거물인 녹음 테이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사건은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닉슨은 ‘국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테이프 제출을 거부하다가 수사망이 좁혀오고 여론이 악화되자 극히 일부만, 그것도 중요 내용을 삭제한 채로 공개했다. 그럼에도 테이프를 통해 닉슨 정부가 도청 뿐 아니라 문서 위조, 매수 등의 부정행위를 광범위하게 저질러 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닉슨의 거액 탈세와 대기업들로부터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도 폭로된다.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이번 사태도 태블릿PC 입수가 계기가 됐고, 연설문 유출로 시작돼 국정 전반에 대한 비리와 부정 의혹으로 번졌다. 워터게이트 당시에도 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특별 검사와 법무부장관의 해임과 사임 등 검찰과 백악관의 갈등이 있었다.

결국 닉슨은 하야냐 탄핵이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하고 상원에서 마저 의결 가능성이 높아지자 닉슨은 1974년 결국 자진 사임한다. 그럼에도 1977년 인터뷰까지 닉슨은 워터게이트의 진상에 대해 정확히 밝히지 않았고 제대로 된 사과도 표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불법행위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프로스트와의 인터뷰가 하나의 ‘사건’이었던 이유다.

▶“나는 국민들을 한없는 고통에 빠뜨렸습니다. 사죄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프로스트는 닉슨을 향해 이렇게 질문한다.

“대통령님,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의 잘못과 관련 된 것들을 말이죠. 그러나궁금합니다. 단순한 실수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지요? 당신의 발언은 국민들이 받아들이기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닉슨은 여전히 딴청을 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프로스트가 말한다.

“좋습니다. 여기를 보시죠. 미국민들이 당신으로부터 듣고 싶어하는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둘째, ‘나는 대통령으로서 직권을 남용했습니다’. 셋째, ‘나는 우리 국민들을 2년동안 한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과합니다.’는 말입니다.”
닉슨의 눈이 떨렸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는 마침내 자신으로서는 최선이자 최후일 사죄를 표한다.

“나는 국민들을 좌절케 했습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나는 국가를 수렁에 빠뜨렸습니다.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정부의 시스템을 망친 일입니다. 정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청년들을 절망시킨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지금 정부가 썩어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겼습니다. 저는 남은 인생동안 그 모든 짐들을 짊어져야 합니다. 내 정치적 생명은 끝났습니다.”

박 대통령의 ‘그 날’은 과연 찾아올까. 그리고 그 앞에는 손석희 앵커가 있을까. 부질없는 줄 알면서 든 생각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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